[직설]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기자 2023. 6. 1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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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골목 안 삼거리 교차점을 지키던 편의점 한 곳이 자리를 떠났다. 아랫목과 윗목, 옆길에서 저마다 새어나온 주민들이 종종 편의점 덱에 놓인 탁자를 사랑방처럼 쓰던 공간이었다. 청년들은 카페에서 만났지만, 어르신들은 그곳에서 모이길 좋아했다. 골목 삼거리는 인파가 시끌대는 지역까지는 못했지만, 개중에서는 가장 목 좋은 자리였다. 건조한 네 글자 문구 ‘임대문의’는 삼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한마디씩 거들게 했다. 편의점에 이어 이곳에 무엇이 들어올까. 다른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들어올 수도, 일본식 선술집이 들어올지도, 카페가 들어올지도 모를 텅 빈 점포를 두고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꽉 찬 가게를 상상했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쯤 돼 보이는 어린이와 그의 어머니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린이도 어김없이 임대문의 글자를 보고 입을 열었다. “엄마. 여기 입지가 나쁘지 않아.” 우연찮게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을 때,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초등학생의 입 밖에서 표현된 ‘입지’라는 말에 적잖은 지적 충격과 감정적 동요를 느꼈다. 지난 몇년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부동산 열풍 현상과 재테크 교육의 담론을 먹고 자란 역사적 어휘 같았다.

나와 달리 태연한 엄마는 어린이에게 여기에 뭐가 들어오면 좋겠냐고 되물었다. 평소였더라면 어머니의 되물음이 동화 같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질문처럼 느꼈겠지만, ‘입지’라는 말을 들은 이상 부동산 분석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입지’를 지켜보던 어린이가 고민 끝에 말했다. “글쎄…. 여러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재밌는 물건도 팔고, 필요한 물건도 팔면 잘될 것 같으니까…. 문방구라면 어떨까?” 어린이의 세계에서 재밌는 물건, 필요한 물건을 가장 많이 파는 가게 아이템, 그 초등학생이 갈망하는 점포는 그들의 작은 백화점인 문방구였다.

그의 대답을 들은 어머니는 피식하고 웃고 말았고, 그대로 어린이 손을 잡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렇다 할 학교조차 찾을 수 없는 역세권 골목 삼거리 한복판에 문방구라니. 나조차도 문방구가 생기게 되길 꿈꾸는 어린이의 말을 엿들으며 ‘이렇게 목 좋은 곳에 위스키바라면 모를까 문방구라니. 참’. 이십년 전, 회식에서 만취한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나를 데리고 가게 천장에 걸려 있는 변신로봇 장난감세트를 5개나 사줘서 부부싸움을 일으켰던 단지 앞 ‘아파트문방구’가 내 기억 속 마지막 삼거리 문방구였건만.

나의 냉소와 달리 어린이는 간절했다. 그가 갈 수 있는 문방구가 들어오길 바랐다. 사무용품은 쿠팡에서, 생필품은 다이소에서 사는 시대에 문방구가 필요한 어른들은 거의 없었음에도…. 어린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지하로, 온라인으로 내몰렸고, 거리에 남아 있는 것은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어른들을 위한 카페와 술집뿐이다. 어린이가 갈 수 있는 곳, 어린이를 환영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국가는 애를 낳으면 몇천만원 더 주겠다며 호소하지만, 정작 태어난 아이의 미래를 포용하고, 상상하고, 북돋는 생기 있는 공간은 이미 다 사라져 없다. 거리에 남은 건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뿐이다. 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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