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경제 항산항심] 다음은 없다

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 2023. 6.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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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사장을 위한 노자’ 저자

경남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여. 고즈넉한 섬 하나가 우릴 반긴다. 대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 죽도(竹島)다. 몇 가구 안 사는 자그마한 섬에 폐교를 고쳐 만든 연수원이 있다. 실패한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정신 무장 및 자기성찰을 위한, 재기중소기업개발원 연수원이다.

매년 봄 진행되는 연수원 출신 경영자들의 워크숍. 일종의 ‘홈커밍데이’ 행사다. 죽도를 다시 찾은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사업 실패 후, 처음 죽도에 와 교육을 받을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밤하늘의 별 무리 속에서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봤다. 아팠지만, 서늘했다. 벼락 같은 죽비였다.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죽도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죽도가 제2의 고향이라고.

나락에 빠진 중소기업 CEO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재단을 만든 사람. 죽도의 폐교를 매입하여 연수원을 가꾼 사람. 교육 과정 하나하나를 기획하고, 4주간의 합숙 교육을 전액 무료로 운영하는 사람. MS그룹 전원태 회장이다. 스물넷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10년은 먹고살려고, 다음 10년은 번듯한 기업을 일구려고, 또 다음 10년은 남에게 지기 싫어서 일을 했다. 여러 차례 부도 위기를 겪으며 생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사업이 자리를 잡고 나이가 들면서 헛헛함이 밀려왔다. ‘베푸는 삶’이란 화두에 꽂힌 게 이순을 바라보던 나이.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을 설립하여 실패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CEO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세월도 어느덧 십 수년.

전략이 가지라면, 뿌리는 철학이다. 뿌리 없는 나무 없듯 철학 없이는 경영도 없다. ‘다음은 없다!’ 죽도에서 만난 전 회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다. “‘꽃 피는 봄에 보자’거나 ‘낙엽 지는 가을에 보자’ 그러면 기다릴 수나 있다. ‘다음에 보자’ 그러면 답이 없다.” 전 회장의 말이다. 돌아보니 “다음에 식사 한번 하시지요” 말을 건넸던 상대방과 식사를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노자 철학 ‘거피취차(去彼取此)’가 겹쳐 보이는 대목이다. 거피취차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의미다. ‘저것’은 추상적인 관념이다. 오지 않을 내일이다. ‘이것’은 눈앞의 실재다. 와있는 오늘이다. ‘저것’이 껍데기라면 ‘이것’은 알맹이다. 요컨대, ‘저기 멀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라는 얘기다.

“하루면 어때/오늘은 내 생의 맨 첫날이자 마지막 날/열심히 잘 놀았다/열심히 잘 살았다.” 채정미 시인이 쓴 동시 ‘하루살이’다. 하루살이에겐 내일이 없다. 다시 없을 오늘이니 귀할 수밖에. 후회 없는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많은 이들이 ‘욜로(YOLO)’를 말한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며 오늘을 낭비한다. 오해다. 착각이다. 되돌릴 수 없는 소중한 삶이니 다시 살아도 떳떳할 하루를 살라는 게 ‘욜로’의 참뜻이다.

10여 년 전 암 수술을 받았다. 대장암 3기였다. 연락도 안 했건만 어찌 알고 지인 몇몇이 병문안을 왔다. 살아서 다시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오늘이 이들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되지 않을까? ‘지금 여기’에 더없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이 보장되지 않아서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내 눈앞의 현재를 희생시키는 삶이다. 오늘이 없는 삶이다. 삶이란 수많은 오늘들의 총합이다. 오늘이 없으니 내 삶도 없다. 다음이 아니라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잡아야 하는 건 그래서다. 거피취차의 노자철학이자 전원태 회장이 역설하는, ‘다음은 없다’의 철학이다.

모두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오늘의 혁신을 자꾸 내일로 미루어서다. 혁신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여기, 구체적인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당장 빗자루를 들고 나가 각자 자기 집 앞을 쓸면 세상은 절로 깨끗해진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대사다. 맞다. 다음은 없다. 지금 여기, 눈부신 오늘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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