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히로시마 후쿠시마초의 ‘호르몬 우동’
한국인은 일본 후쿠시마라고 하면 으레 원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히로시마에도 후쿠시마가 있다. 후쿠시마초(町)가 그곳인데 여행자들에겐 ‘호르몬 우동’을 먹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고기 국물과 곱창을 곁들인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필자는 2000년대 후반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조선인 원폭피해자 조사를 위해 갔을 때 처음 호르몬 우동을 접했다.
후쿠시마초는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는 피차별 부락이었고, 원자폭탄이 투하된 폭심지에 가까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당시 히로시마의 조선인은 주로 고물상이나 토목 공사장 인부, 인쇄소나 제재소 인부, 히로시마 항만과 역의 잡역, 농사에 종사하거나,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산요공업주식회사 등 군수업체에 강제징용돼 와 있었다. 일본인이 꺼려하는 도축업은 조선인이 주로 담당하는 일이었다. 조선인은 도살장에서 잡은 소나 돼지 고기 부위 중 일본인이 먹지 않는 내장 부속을 식재료로 사용했다. 일본어로 이를 ‘호르몬’이라 한다. 이렇듯 호르몬 우동은 히로시마의 피차별 부락에서 살던 조선인의 삶 속에서 탄생했다.
후쿠시마초에는 “원폭 슬럼”도 있었다. 원자폭탄으로 도심 전체가 파괴된 이후 히로시마 도시 재건 정책이 본격화되기 전의 행정 공백 속에서 제방을 따라 불법 가설주택들이 밀집해 들어섰는데, 원폭으로 집을 잃고 주소지를 갖지 못한 조선인 피폭자들이 다수 거주했다. 이곳은 1970년대 히로시마시의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됐고, 다수의 조선인은 임대아파트로 이주했다.
재개발사업 당시 조선인의 삶을 기록했던 작가 우에하라 도시코는 원폭 슬럼에 살았던 조선인이 피폭 문제보다 취직 차별, 빈곤, 교육 문제, 의료보험 등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겪고 있던 일상적·제도적 차별을 더 크게 인식했다고 기록했다. 비슷한 시기 이곳을 방문했던 교육자 하시모토 에이치는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할머니가 “무슨 일인지 이번 해에는 살아 숨 쉬는 것도 원망스럽고, 손자의 허기진 배가 지금도 걱정이라, 왜 나는 죽지 않는 걸까, 혹시 일본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자살 약을 사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 피폭의 문제가 식민과 빈곤, 차별과 가족 이별 등 그들이 일제강점기에 건너온 이후 겪은 여러 고통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히로시마 재일동포에게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의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 참배와 재외동포청 출범 이후 히로시마 동포 초청이 첫 업무가 되리라는 소식은 어느 때보다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할 것이다.
위령비 참배에 동행했던 박남주 여사는 재일조선인피폭자구호시민회와 교류하며 한국 원폭피해자 지원에 힘써온 분이다. 그는 한국 원폭피해자 지원이 한·일 간 역사 화해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바람이 이른 시일 내에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오은정 서울대 인류학과 BK21교육연구단 BK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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