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포기하지 않았던 오뚝이, 전형수 명지고 코치

손동환 2023. 6. 1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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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5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4월 17일 오전 11시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 ‘오뚝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아무리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게 ‘오뚝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농구 인생을 ‘오뚝이’라고 표현한 이가 있다. 전형수다. 숱한 어려움에도 자기 몫을 다했던 그는 현재 모교(명지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침과 동시에, 어려움에 맞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왼손잡이 공격형 가드
명지고등학교를 졸업한 전형수는 고려대학교로 진학했다. 속공 전개와 공격력, 왼손잡이라는 이점을 지닌 전형수는 이규섭(현 SPOTV 해설위원)-이정래 등과 함께 대학 무대에서 활약했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200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여수 골드뱅크(현 수원 KT)의 부름을 받았다. 드래프트에 참가했던 가드 중 가장 먼저 프로 무대를 밟았다. 데뷔 시즌부터 정규리그 전 경기 출전(54경기)에, 경기당 33분 21초 동안 15.6점 3.7어시스트 2.2리바운드에 1.1개의 스틸을 기록했다. 신인답지 않은 활약을 기록지에 남겼다.

200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제가 입단한 팀이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신인들에게는 기피 대상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기뻤습니다. 저를 ‘2순위’라는 높은 가치를 부여해준 팀이고, 고려대학교 선배님이신 (현)주엽이형(전 창원 LG 감독)과 (김)기만이형(현 서울 SK 수석코치)이 있는 팀이었거든요. 무엇보다 프로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2순위로 프로에 입성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대학교 초반만 해도, 저의 가장 큰 역할은 수비와 경기 운영이었습니다. 특히, 상대 외곽 주득점원을 막는데 중점을 뒀어요. 그러다 보니, 공격력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렀고, 드래프트가 다가왔습니다. 당시 최철권 선생님께서 “너도 2대2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슈팅과 공격에 신경 써라”고 하셨어요. 저 역시 공격력 향상에 많은 시간을 기울였고, 4학년 정기전 때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습니다. 그게 프로 구단 관계자 분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줬던 것 같아요. 그런 이유 때문에, 2순위로 지목됐다고 생각합니다.
데뷔 첫 시즌부터 맹활약했습니다.
저는 (김)승현이(전 해설위원)처럼 천재적인 선수가 아닙니다. 그래서 공수 모두 탄탄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비는 좋다는 평가를 이미 받았기에, 공격적인 면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또, 팀에 득점할 수 있는 외곽 자원이 없었어요. 진효준 감독님께서도 “너가 주득점원을 해야 한다”고 주문하셨어요. 게다가 에릭 이버츠라는 영리하고 까다로운 외국 선수가 저희 팀에 있어서, 제가 공격하기 더 편했습니다. 그래서 데뷔 시즌부터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숱한 트레이드 그리고 FA
위에서 이야기했듯, 전형수의 소속 팀인 골드뱅크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코리아텐더가 골드뱅크를 대신했지만, 코리아텐더의 여건도 불안했다.
코리아텐더는 전형수를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로 현금 트레이드했다. 모비스 소속으로 뛰던 전형수는 2003~2004시즌 도중 창원 LG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2004~2005시즌부터 서울 SK 유니폼을 입었다.
군 제대 후 SK로 돌아왔지만, 2007~2008시즌 도중 모비스로 또 한 번 이적했다. 그리고 FA(자유계약)를 취득한 전형수는 계약 기간 5년에 2008~2009시즌 보수 총액 2억 6천5백만 원의 금액으로 LG와 또 한 번 합을 맞췄다.

데뷔 시즌 직후 모비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첫 시즌을 너무 잘 보냈고, 저 스스로도 ‘여기서 은퇴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물론, 코리아텐더가 재정적으로 부족한 팀이기는 했지만, 저는 형들과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선수들 간의 정도 깊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트레이드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어요. 다리가 풀렸고, 저를 포함한 모든 선수들이 울었습니다. 구단을 향한 원망스러운 마음이 생겼고, 트레이드 때문에 불면증까지 생겼습니다.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가 저를 데리러 왔을 때만 해도,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 후 3번의 트레이드를 경험했습니다.
경험이 쌓이니까, 무덤덤하더라고요.(웃음) ‘이게 프로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동시에, ‘내 가치를 알아봐주는 곳이 있어서, 내가 트레이드되는 거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2007~2008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습니다. LG 유니폼을 입으셨는데요.
(양)동근이(현 울산 현대모비스 코치)가 없었다면, 저는 모비스에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동근이의 군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동근이랑 함께 한다면, 저와 동근이의 포지션이 겹칠 것 같았어요.
모비스에서는 “(양)동근이랑 너를 공격형 가드 원투펀치로 활용할 거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얼마 못 갈 거다. 너가 밀릴 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민이 많았죠.
그때 LG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LG가 플레이오프에는 자주 갔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상대 가드진보다 우위를 점하지 못했어요. 물론, LG에도 (이)현민이라는 출중한 가드가 있었지만,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저를 영입했다고 생각해요. 또, (현)주엽이형과 (조)상현이형(현 창원 LG 감독) 등 친한 형들도 LG에 있었고요.

‘마지막’이라는 그림자
FA였던 전형수는 LG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FA 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예전 같은 공격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FA 마지막 시즌에는 LG와 함께 하지 못했다. 고양 오리온스(현 데이원스포츠)로 이적했다. 베테랑 가드로서 자기 역할을 다했지만, 떨어진 가치를 회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이라는 그림자를 마주했다. 2013~2014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FA로 LG에 간 후, 이렇다 할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2004~2005시즌을 SK에서 보냈고, 군 제대 후 SK로 돌아왔습니다.(전형수는 2년 6개월 동안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했다) 공백기가 길었고 FA를 앞두다 보니, 여러 압박감을 받았습니다. 기록이 많이 떨어졌죠.
모비스로 이적한 후에는 평균 두 자리 득점을 기록했습니다.(전형수는 2007~2008시즌 모비스에서 경기당 10.0점을 기록했다) 유재학 감독님(전 울산 현대모비스 총감독)께서 저의 장점을 살려주셨거든요. 또, 그 당시 저희 팀 외국 선수가 약했습니다.(모비스의 당시 외국 선수는 키나 영과 에릭 산드린이었다. 에릭 산드린은 이승준의 귀화 전 이름이다) 그래서 제가 많은 득점을 해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LG에 갔습니다. ‘부상 때문에 부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말씀드리기 어려운 문제들이 여러 가지 있었어요. 그래서 (부진의) 안타까움이 더 컸습니다.
2012~2013시즌에는 고양 오리온스로 이적했습니다.
김진 감독님께서 2011~2012시즌 새롭게 부임하셨습니다. 저에게 ‘전력분석원’을 제의하셨습니다. 하지만 저와 LG의 계약 기간이 1년 남아있었고, 몸도 아프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수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추일승 감독님(현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같이 해보자”고 하셨어요. 아마 2대2를 할 수 있는 베테랑 가드를 필요로 했던 것 같아요. 오리온스로 이적한 저는 (전)태풍이의 백업 역할을 나름 잘했고,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후배들도 많이 독려했고요. 그런 이유 때문에, 팀에서 저에게 주장이라는 경험을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했어요.
하지만 오리온스에서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2013~2014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고요.
2012~2013시즌 종료 후, 서동철 코치님(전 수원 KT 감독)께서 청주 KB스타즈 감독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저를 코치로 데려가려고 하셨지만, 상현이형이 마침 은퇴했어요. 저까지 팀을 떠나면 최고참이 없는 상황이라, 추일승 감독님께서 저를 보내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의 몸 상태가 2013~2014시즌에 좋지 않았습니다. 후배들 자리만 빼앗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정인교 감독님(전 인천 신한은행 감독)께서 추일승 감독님한테 “(전)형수를 코치로 쓰고 싶다”고 하셨어요. 추일승 감독님께서는 저를 D리그 코치로 활용하려고 하셨는데, “신한은행에서 너에게 코치를 제의했다. 두 번은 못 잡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저는 은퇴를 했고, 은퇴 후 신한은행 코치로 갔습니다.

은퇴 후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를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형수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 여러 경험들을 했다. 먼저 2014~2015시즌부터 5년 동안 인천 신한은행에서 코치를 맡았다. 2015~2016시즌 중반에는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여자프로농구에서 지도자를 경험한 후, 안양고등학교의 코치를 맡았다. 그리고 지난 2021년부터 모교인 명지고등학교의 코치를 하고 있다. 여러 위치에서 제2의 인생을 이어갔고, 여러 위치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인천 신한은행에서 5년 동안 코치를 맡았습니다.
부임 첫 해만 해도, 하은주와 신정자, 최윤아(현 대한민국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코치)와 김연주, 김단비(아산 우리은행) 등 선수들이 괜찮았습니다. 그렇지만 (하)은주와 (최)윤아는 무릎이 너무 좋지 않았고, 팀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부임 두 번째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정인교 감독님께서는 중간에 자진 사퇴하셨습니다.
신기성 감독님께서 새로 부임하셨지만, 저희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의 차이도 크고, 고참 선수들과 어린 선수들의 기량 차이도 너무 많이 나더라고요. 또, 여자 선수들의 심리적인 요소와 경기 외적인 요소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습니다. 그런 점이 많이 힘들었어요. 정말 다사다난했어요.
신한은행에서 오랜 시간 코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양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셨는데요.
신한은행과 계약이 만료됐습니다. 그때 안양고 농구부장이었던 제 친구가 “야인으로 지내는 것보다, 농구 후배들에게 너의 경험을 전수해주면 좋겠다. 기본기부터 다져주면 좋겠다”며 저에게 연락을 줬어요.
그렇게 안양고 학생 선수들과 만났습니다. 가르치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나더라고요. 또, 선수들이 나쁘지 않아서, 재미있게 잘 했던 것 같아요.
2021년부터 모교인 명지고등학교에서 코치를 맡고 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안양고를 떠났습니다. 때마침 모교인 명지고 코치가 공석이었어요. 지원과 면접 후, 명지고 코치로 부임했죠.
부임 당시에는 멤버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여러 선수들이 전학 갔습니다. 5명만 남았더라고요. 성적은 물론, 출전 자체도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선수 보강이 잘 이뤄졌고, 올해 춘계연맹전과 협회장기에서는 괜찮은 성적을 남겼습니다.(명지고의 춘계연맹전 성적은 8강 진출이었고, 협회장기 성적은 본선 진출이었다)
여자프로농구와 아마추어 농구 등 여러 무대를 경험했습니다. 선수 시절에 경험했던 농구와는 달랐을 것 같아요.
선수 때보다 더 꼼꼼해진 것 같아요. 특히, 고등학생 같은 경우, 기본기를 어떻게 이행하는지 자세히 봐야 해요. 더 높은 무대로 갈수록, 기본기가 잘돼있어야 하거든요. 또, 요즘 어린 선수들이 기본을 등한시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구요? 애증이죠(웃음)”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전형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자신의 농구 인생이 어땠냐?”고 말이다.
전형수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오뚝이’라고 표현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던 경험들을 떠올렸다. 농구를 향한 사랑도 여전히 커보였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할 것 같다”며 인터뷰를 마쳤기 때문이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한참을 생각한 후) 인생인 것 같아요. 그리고 농구가 저희 가족의 삶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아들이 지금 농구를 하고 있고, 9살인 막내도 “농구하고 싶다”고 저에게 이야기했거든요. 농구를 전혀 몰랐던 아내도 집에서 농구 이야기를 할 정도니까요.(웃음)
‘전형수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오뚝이 같아요. 저의 선수 생활이 화려했던 것도 아니고, 잘하다가 넘어질 때도 많았거든요.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고요. 그렇지만 저는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넘어지다 일어나는 일을 반복했던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들께서 이야기해줬던 걸, 내가 더 빨리 깨우쳤다면... 내가 이걸 이렇게 했다면, 그때보다 더 잘했을 건데...”라고요. 학생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아요.
지금도 농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허리만 좋았다면, 1대1도 하고 경기도 하고 싶은데...(웃음) 허리가 좋지 않아서, 함께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점이 조금 아쉬워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 KBL 제공(본문 1~4번째 사진), 전형수 제공(본문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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