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가 제시한 전자책의 ‘몸값’

김진철 2023. 6. 1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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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게티이미지뱅크

[편집국에서] 김진철 | 문화부장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전자책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해커들이 전자책 100만권을 알라딘에서 빼냈다고 텔레그램 익명 채팅방에서 주장했다. 자신들의 해킹 주장을 입증하려고 전자책 파일들을 대화창에 공개하기도 했다. 100비트코인(약 34억원)을 보내지 않으면 100만권 전부를 유포하겠다고 알라딘을 협박했다. 이랬던 게 지난달 중순께다. 아직 100만권 해킹이 사실인지, 부풀려 주장하는 것인지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알라딘 쪽은 전자책 해킹·유출 사실을 인정했고,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전자책 5천여권이 불법 유통됐다고 공식 확인했다. 이 5천여권은 해커들이 텔레그램방 채팅에 공개한 전자책 파일들이다.

100만권 해킹이라는 해커들 주장이 사실이라면 막대한 규모다. 2021년 한 해 동안 신간이 모두 6만4657종(납본 기준) 발행됐으니, 단순 계산으로만 15년치 신간에 해당하는 정도다. 무엇보다 전자책 해킹 사건 자체가 초유의 사태다.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파일 공유로 무제한 복제와 유통이 가능하다. 온라인 세상에서 퍼지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퍼질 수 있다. “몇십년간 유령처럼 온라인에서 떠돌 것”이라는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우려는 지나치지 않다. 이미 빈사 상태에 이른 출판사들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너무나 조용하다. 알라딘 쪽에서 사과문을 내면서 경찰에 수사 의뢰하고 정확한 피해 규모와 경위를 파악 중이라고 했는데, 아직 아무런 진척 상황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해커들이 어떤 방식으로 보안을 뚫고 전자책을 빼냈는지도 알 수 없다. 전자책이 아니라 케이(K)팝 음원이나 오티티(OTT) 드라마 시리즈가 해킹됐어도 이렇게 조용할까.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이 털렸다면 어땠을까. 온 나라가 벌집을 건드린 듯 시끄러웠을 것이다.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고 재발 방지 대책이 논의됐을 것이다. 글과 책도 노래나 영상처럼 창작물일 뿐 아니라 작가들의 소중한 자산인데, 전자책 해킹 사태는 어쩐지 신기하리만치 조용하기만 하다.

이미 유출된, 베스트셀러가 포함돼 있다는 5천권을 떠올리면 입이 쓰다. 불법 파일을 내려받거나 유통하는 것은 범죄행위다. 그러니 해커들이 공개한 5천권이, 3천명이 있던 익명 채팅방에 올라왔어도 더는 퍼지지 않는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으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직시해야 할 현실은, 수준 높은 시민의식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는 한국이 아닐까 싶다. 1년간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성인이 절반이 넘는 나라에서, 전자책 해킹이 대형 사건으로 인식되긴 어려울 것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출판지원사업을 뒤흔들고 도서관을 스터디룸으로 활용하겠다고 나서도 별 관심을 받지 않는 독서 후진국임을 또다시 절감한다. 해커들이 제시한 전자책 ‘몸값’이 1권에 3400원꼴이니, 이 나라의 독서와 출판 현실을 보여주는 이보다 더 적나라한 숫자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정부는 그사이에 케이북이라는 말까지 들고나왔다. 지난 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박보균 장관까지 나서서 ‘케이북 비전 선포식’도 열었다. 여느 부처들이 내놓는 성장 전략처럼 4대 전략과 10대 추진 과제도 발표했다. 세계 3대 문학상 수상이라는 목표에까지 박수 칠 생각은 없지만, ‘케이컬처의 바탕은 책’이라는 비전의 한 대목이나, 모두가 장벽 없이 책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전략은 기립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전자책 제작 지원을 확대하고 디지털 도서 물류체계도 마련하겠다는 전략도 시의적절하다.

그런데도 어딘가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전자책 100만권이 해킹되고도 이토록 조용한 세상에서, 정부는 성대하게 케이북 비전을 발표하고, 그에 앞서 연간 84억원 규모의 예산이 들어가는 세종도서 사업을 수술하겠다고 나선 판이니, 그야말로 ‘웃픈’ 현실이 아닌가. 누구나 책을 쓰고 누구나 출판할 수 있도록 하려면, 누구나 책을 쓰고 싶고 누구나 출판을 하고 싶어야 하는데 ‘책 덮은 나라’에서 가능한 일일까. 유통 플랫폼 보안이 더욱 강화되고 전자책이 범죄의 인질이 되지 않아야겠지만, 책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몹시 씁쓸하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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