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시·전라도 지역사 편찬 논란…식민사학 시비에 발목 잡힌 역사서

한겨레 2023. 6. 1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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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가 ‘식민사학’ 의혹을 제기한 <전라도 천년사> 4권 표지. <전라도 천년사> 누리집 갈무리

[왜냐면] 이영식 | 인제대 명예교수(가야사)

구태의연한 식민사학 시비가 새로운 지역사 편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문과 다라의 지명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등재가 확실시되자 이번에는 같은 이유로 경남 김해시와 전라도의 지역사 편찬 저지에 나서고 있다. 모처럼 지방정부가 결심한 지역사 편찬사업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중앙 중심주의적 역사관에 가려 있던 지역사의 특수성과 역사상을 조명하고자 했던 지역사 복원과 편찬에 친일 식민사관의 낙인을 찍어 반대 소동을 벌이고 있음에는 아연실색할 뿐이다. 심한 오해와 의도적 왜곡으로 선동하는 시끄러운 소수에게 대꾸할 필요는 없지만, 민원을 제기했던 시민들에게는 성실하게 답변할 의무가 있다.

첫째, 일본서기 사용은 불가하다는 원칙적 반대가 있다. 이전 세대에게 ‘일본서기는 거짓말 책(위서)’이라는 게 상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에 천관우 선생이 “일본서기는 위서가 아니라 재미있는 책”이라 선언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가야사’를 발표한 이래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길이 열렸다. 이후 임나일본부설의 극복과 가야사 복원은 물론, 백제사와 신라사 등 우리 고대사의 새로운 역사적 장면을 복원하는 노력이 진행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아직도 일본서기의 황국사관을 겁내 건드리지 못할 종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구세대의 잔재이며, 그동안 쌓아 올렸던 학술적 성과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둘째, 일본서기가 지배 대상으로 설정했던 지명 사용은 식민사학이라는 의견이다. 일본서기 신공기에 기록된 침미다례는 전남 해남, 포미지는 전북 정읍, 벽중은 김제, 그리고 계체기에 기록된 기문은 남원으로 서술해 왜의 식민지로 만들었단다. 전라도 천년사와 김해시사 어디에도 이 지역을 왜의 식민지로 기술한 부분은 전혀 없다. 기문을 남원의 운봉으로, 침미다례를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추정)하지만, 여기에서는 왜가 아닌 가야와 마한·백제 계통의 유물과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서기의 기문과 침미다례 등을 왜의 지배와 전혀 무관한 가야와 마한의 역사로 서술한 것이다.

셋째, 일본서기의 임나와 관련 국명·지명을 한반도에서 구하면 식민사학이라며, 임나 관련 국가 모두를 삼한·삼국·가야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해 건국했던 분국들로 보는 이른바 북한 분국론을 맹종하는 의견이다. 임나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임나가라(400년), 삼국사기 강수 전의 임나가라(7세기),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문의 임나왕족(924년), 한원의 임나(당대)처럼 고구려·신라인과 중국인은 보다 일찍 가야를 임나로 기록했었다. 광개토대왕이 임나가라를 치러 대한해협을 건넜던 것도 아니었다. 보병과 기병 5만으로 기록했을 뿐, 대방 해역에서 활동했던 ‘수군’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문을 연구했던 북한의 박시형 등도 임나가라는 김해나 고령의 가야라 했다. 아울러 신라의 강수나 진경대사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서기는 541년과 544년에 백제 성왕이 개최했던 2차례 사비회의에 아라, 가라, 다라 등의 참가를 기록했다. 이 백제 성왕을 일본열도의 분국왕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사비, 곧 부여에 찾아갔던 나라들 역시 백제 인접의 가야왕국들이었다. 일본의 지배란 황국사관적 내용을 걸러낸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하지 않는 백제사와 가야사의 새로운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 우리가 선학들과 다르게 일본서기의 비판적 활용을 진전시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국사의 균형적 서술과 지역사 복원의 사명에서 많은 역사학 연구자들이 연구와 집필에 동참했다. 이런 학자들에게 무슨 득이 있다고 식민사학을 계승 전파하려 하겠는가? 어려운 유학생활에 독립운동처럼 임나일본부설 타파에 매진했던 학자도 있고, 지역사의 새로운 발견에 평생을 바쳤던 학자도 있다. 지역사에 대한 의도적 왜곡과 마녀사냥의 선동으로 어느새 자기검열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학문의 자유와 새로운 지역사가 멀리 사라지는 순간이다.

식민사학과 반일을 천하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선동가들은 표만 의식하는 정치인들을 회유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사실관계의 확인도 없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이들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앞서 주도했던 가야고분군 등재신청 반대 국민청원은 8천여 명의 동의에 그쳐 실패했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시끄럽지만 선동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시끄러운 소수에 현혹돼 다수의 국민을 저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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