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걱정하는 ‘고립된 사람들’을 떠올리며 녹색평론을 붙잡았다”[인터뷰]
창간인 고 김종철 이어 잡지 계승
김정현이 ‘녹색평론’ 발행·편집인을 맡았을 때 세상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아버지(고 김종철) 딸이라서 무조건 우호적 평가를 하는 분들이 있었죠. 또 아버지 딸이라서 ‘그냥 옆에 있던 자녀가 뭘 알겠어’라며 ‘자격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았고요.”
김정현은 ‘아버지의 후광’에 관한 질문을 두고 “후광이 있기도 하고, 그게 방해가 되기도 한다”며 “세습처럼 여기며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는 듯했다”고 전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명예의 자리라고요.”
종이 계간지나 격월간지 독자 수는 줄어든다. 대부분 매체가 경영난에 시달린다. ‘녹색평론’은 한때 은행 빚 내기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생태 위기에 관한 정보를 접할 데도 많아지면서 한국 유일의 생태 담론 매체라는 독보적 지위도 흔들렸다. 여러 힘든 상황에서 맡은 발행·편집인 자리를 두고 세습이니 명예니 하는 세간의 말에 김정현은 헛웃음이 나는 듯했다.
김정현이 이어 말했다. “제가 아버지 딸이 아닐 수도 없는 거죠. 주어진 조건이니까요. 신경 안 씁니다. 저대로 제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거죠.” 지난달 말 휴간 17개월 만에 낸 복간호(182호)는 그 결과물이다. 지난 3일 서울 종로 ‘녹색평론’ 사무실에서 만나 ‘제 할 일’과 ‘김정현과 녹색평론’에 관해 들었다.
“‘녹색평론’만 해도 182권을 다 읽었지요.” 그저 읽기만 한 건 아니었다. 1991년 ‘녹색평론’ 창간호가 나왔을 때 김정현은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가 가족하고 의논을 많이 하셨어요. 글 같은 거 쓰시면 가족한테 먼저 보여주셨어요. 비판을 거친 뒤에야 발표하셨죠.”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번역도 맡았다. “그때 제가 얼치기니까, 아버지가 감수하셨죠. 초창기 저나 오빠, 어머니가 번역한 글에는 옮긴이 이름이 없이 게재된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 번역글도 이름을 넣지 않았지요.”
김정현은 이과 출신이라 과학/이공계 관련 글 번역과 녹취를 주로 맡았다고 한다. 홍콩 출신 과학자 매완호 글 번역을 기억에 남는 것으로 뽑았다. “‘녹색평론’은 초창기에 현대 기술이나 현대 과학 비판을 많이 했거든요. 매완호는 그때 많이 번역했던 필자 중 한 명입니다.” 김정현이 과학을 더 공부할 생각을 단념한 데는 초창기 번역글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2022년엔 영국 저술가 이보 모슬리의 <민중의 이름으로 - 가짜 민주주의, 세계를 망쳐놓다>(녹색평론사)를 직접 번역해 내놓았는데, ‘녹색평론’ 연재물의 하나다.
여러 공부를 이어갔다. 어려서는 집안에 굴러다니던 외국 저널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2004년부터 김종철이 기획한 ‘이반 일리치 읽기 모임’에도 참여했다. 매주 1회 진행한 모임은 10년 넘게 이어졌다.
틈틈이 잡지 일을 도왔다. 1995년 <녹색평론> 홈페이지를 만든 이도 김정현이다. ‘녹색평론’이 사무실을 대구에서 서울로 옮긴 2008년부터는 잡지·단행본 편집 실무 일체와 독자, 필자 관리도 도맡았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면서 일했다. 자기 뜻과 의지로 한 일이다.
“아버지 일이라서 도운 것도 있지만, ‘녹색평론’ 일이 저한테도 중요하기 때문에 도왔어요. 제가 버티려면 ‘녹색평론’이 필요하고요.”
김정현은 중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삶의 터전인 지구 생태계와 사회가 망가질 것이라고 믿으며 자랐어요.” 의미 있는 일은 농사를 짓거나 ‘녹색평론’을 만드는 일을 돕는 일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상한 존재로 보이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냈어요. 주변에 친구가 없어 외톨이로 지냈지요. 창문 열고 에어컨 켜는 걸 보면 분노가 차오르던 아이였으니까요(웃음). 나중에 그레타 툰베리에게 매우 공감하기도 했죠.”
‘녹색평론’을 읽으며 버텼다. “제 속에 깜깜하고 답답한 것들을 해소하는 글들이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느꼈죠. 저같이 느낄 분이 한 분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녹색평론’을 계속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30주년 181호서 정리 고심 했지만
경제성장·과학기술 ‘맹신’은 여전
이런 상황이 ‘녹색평론’ 존재 이유
김정현과 김종철은 ‘녹색평론’ 30주년이 되던 2021년 181호(11~12월호)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김종철은 그 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정현은 “아버지는 제가 후계자가 되는 걸 바라진 않았을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 재밌는 일입니까? 즐거운 일입니까? 답답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김정현이 보기에 세상의 생태는 1991년보다 더 나빠졌다. 김정현도 더 답답해졌다. “지금 채식도 해야 하고, 환경도 돌봐야 한다는 말들이 많으니, 다들 생각이 많이 바뀐 것처럼 얘기하는데 하나도 바뀐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경제성장만이 문명 생활과 인간해방을 가져올 수 있고, 산업화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며, 과학기술이 우리 생활을 전면적으로 개선한다는 식의 근대적 미신들이 지금도 안 깨지고 있다”고 했다.
김정현은 이 미신이 안 깨진 상황에서 ‘녹색평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경제성장을 이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최근에는 제법 나온다. 김정현은 이런 인식 전환에 ‘녹색평론’ 담론이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계속해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이야기를 하려 한다.
“30년 전에도 ‘녹색평론은 홍수가 났는데 나무 심자는 얘기를 한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그때 나무를 심었다면 이 상황이 안 왔을 텐데요. 지금은 더 큰 홍수가 났죠. 여기 압도당해서 허겁지겁 딴짓하다 보면 10년 뒤 더 큰 홍수를 불러올 겁니다. 홍수에 맞서는 건 나무 심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죠. 모든 가치 체계를 뿌리에서부터 바꾸는 급진적인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김정현은 “예를 들어, 기름차를 전기차로 바꾸는 게 답이 아니다. 차를 안 타도 되는 생활권을 만드는 게 답”이라고 했다.
연장선에서 복간호인 182호에 농촌·농사에서 인류사회 지속 가능성을 찾으려는 ‘자급을 생각한다’와 ‘21세기 농본주의’ 연재를 시작했다. “자급 하면 어디 산속에 들어가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자본주의 시장에 매이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자급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취하고 사는 방식이 자급이죠. 누군가 자기 몫 이상으로 가지면, 누군가는 굶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자본주의 산업사회라는 기차에 타고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녹색평론’은 복간호부터 계간으로 전환했다. 김정현은 “시간을 두고 더 깊은 이야기를 전하려는 뜻”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공감과 위로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미래가 없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속 어둠에 공감하려 합니다. 단 한 사람도 그런 고통을 겪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편집 방향과 목표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이다. 우울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체념하고 무력감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싶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를 전하려는 뜻 같았다.
김정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한동안 ‘녹색평론’을 계속 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절망 때문에 고립된 사람들을 떠올리며 ‘녹색평론’을 계속 붙잡았다. 2020년 김종철 작고 이후 2021년 30주년 기념호까지 1년 반 동안 ‘녹색평론’을 계속 발행한 동력은 ‘고립된 사람들’이다. 그는 “한국에 구독자들의 힘으로 유지되는 잡지 모델이 한 개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쳤을 때 ‘녹색평론’ 발행 겸 편집인 적격자는 김정현 말고는 찾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greenreview.co.kr/greenreview/3086/
https://m.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05311501001
https://www.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111142031005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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