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맛’ 이건희 컬렉션

2023. 6. 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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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미술 전시 ‘경기도 미술관’
조화·자연·향수·순환 ‘사계’로 명명
여성 작가 섹션도 따로 마련 ‘눈길’
이인성, 석고상이 있는 풍경, 1934, 종이에 수채, 55.2×74.6cm, 대구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경기도미술관 제공]
나혜석, 자화상, 1928 추정, 캔버스에 유채, 89x76cm,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경기도미술관 제공]

지난 2021년 4월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수집했던 문화재와 미술품 2만3283점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지역미술관에 기증됐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규모 기증이었다.

국민적 관심 속에 서울에서 대대적인 전시를 마친 이건희컬렉션은 지난해 10월부터 전남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 국공립미술관에서 순회전이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건, 같은 컬렉션 작품을 기반으로 하는데도 미술관마다 박물관마다 그 ‘맛’이 다르다는 데 있다. 컬렉션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내고 기획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전시가 펼쳐지는 것이다.

특히 지난 8일부터 시작된 경기도미술관의 전시는 이건희 컬렉션 중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작품만을 모아 특별전을 연다. ‘사계’로 명명된 이 전시는 기증된 작품 뿐 아니라 미술관 소장 및 국내 11개 기관에서 작품을 대여해 41명 작가의 작업 90점으로 전시를 꾸렸다. 김종태의 ‘사내아이’(1929)부터 방혜자의 ‘우주의 춤’(2010)까지 근 100년을 아우른다. 일제강점기, 전쟁과 분단, 민주화 등 휘몰아치는 현대사를 살아낸 예술가들이 시대와 교감하며 남긴 작품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 속 미술이 어떻게 추동됐는 지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 제목과 달리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없다. 대신 조화, 자연, 향수, 순환 등 네 계절이 추상적 개념으로 확장했다. 미술관 측은 “통찰력 있는 묘사와 조화로운 구성으로 클래식 음악의 고전이 된 비발디의 ‘사계’처럼 한국 근현대미술에 수작을 남긴 작가들의 작업을 모았다”며 “동시대미술의 자양분이 된 업적을 다채로운 화음처럼 선보이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4개의 섹션과 1개의 특별 섹션으로 구성됐다. 관객들은 가장 먼저 ‘새로운 계절’을 만난다. 20세기 초 서양 미술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조선 화단은 근대적 개념인 미술과 전통적 서화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조화’는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키워드였다.

인물화로 잘 알려진 이인성의 정물 ‘석고상이 있는 풍경’(1934)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불상, 옥수수, 마늘, 배, 사과, 포도 등 우리 땅의 산물들이 정물로 자리잡았다. 1930년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서양 미술’ 스타일의 정물과 비교하면 ‘한국적’ 회화를 찾고자 했던 작가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다.

두 번째 섹션은 ‘자연으로부터’다.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 전통 회화를 계승하면서도 근대적 화법으로 한국 산수를 그렸던 화백들의 작품부터 한국의 산을 단순한 형태로 환원해 추상미를 탐구했던 유영국, 산의 정기를 거친 터치로 그려낸 박고석과 제주의 바다나 나무 같은 평범한 풍경인데도 비극적 현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강요배의 작품이 이어진다.

이어지는 ‘향수의 계절’에서는 일제 치하, 전쟁과 분단이라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된다. 아이를 업고 일하는 여인이나, 지붕 낮은 초가집의 풍경을 그린 박수근, 헤어진 가족을 죽는 날까지 그리워했던 이중섭의 수작이 나왔다. 특히 박수근의 ‘절구질 하는 여인’(1959)은 그의 작업 중 보기 드문 대작인 데다 화강암 표면 같은 작가 특유의 독특한 질감과 색감이 살아있어 눈길을 끈다.

마지막 섹션인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은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을 상징한다. 문인적 수행의 과정으로 화면을 채운 김환기와 실존적 본질을 연구한 권진규, 물성의 실험 끝 단색조의 색점 화면에 이른 곽인식 등 한국 추상의 대표 작가들 작업이 모였다.

사계절에 속하지 않은 1개의 특별 섹션은 한국 근현대 여성작가의 작업들만을 모았다. ‘또 하나의 계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국내 1세대 여성조각가 김정숙, 남성 작가들도 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시도를 과감하게 펼쳤던 박래현, 천경자, 방혜자의 작업이 이어진다. 남성작가 중심으로 편성된 한국 화단에서 존재 자체가 도발이자 변혁이었던 여성 작가들의 작업은 더 치열하게 느껴진다. 이미지는 익숙하지만 원본은 좀체 공개되지 않았던 나혜석의 자화상(1928 추정)도 오랜만에 관객과 만난다.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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