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장인이 만든 역사유물 다리, 만든이의 자취는 사라지고

한겨레 2023. 6. 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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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원철스님의 소엽산방]

픽사베이

때 이른 더위와 강렬한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울 성동구 화살곶벌(箭串坪)을 찾았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해지면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합수지역이다. 군사용 말을 키우거나 왕들의 사냥터로 이용되었으며 때로는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화살’이란 조금 살벌한 이름이 지명에 붙었다.

하지만 땅이름과는 달리 넓다란 평지는 야생화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한양 인근의 명소 10개소를 골라 시를 붙인 ‘한도십영(漢都十詠)’에 올라갈 정도로 괜찮은 경관이 있던 곳이다. 선생께서 어느 봄날 화살곶 들녘의 풀꽃을 찾아가 봄놀이를 즐겼다는 ‘전교심방(箭郊尋芳)’에는 주변 풍광까지 살뜰하게 묘사했다.

“손바닥처럼 평평한 들에 풀은 돗자리 같은데(平郊如掌草如茵)

......삼삼오오 벗을 지어 풀꽃을 찾아가네(三三五五尋芳草)”

하지만 지금은 풀꽃을 감상하려고 해도 접근조차 어렵다. 강으로 진입을 막는 안전팬스에 더하여 ‘조류인플루엔자 예방을 위해 철새도래지에 출입하지 말라’는 안내문 현수막까지 달아 놓았다. 푸른 갈대는 이미 키를 넘길 만큼 자랐다. 또 저절로 자란 야생화가 아니라 인공으로 키운 꽃들이 여기저기서 그 역할을 대신했다. 거리를 두고서 눈으로만 바라보며 옛 풍경과 지금 풍경을 상상으로 비교해가며 살폈다.

왕들의 사냥터 출입을 위해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로써는 이 정도 규모의 다리 만들기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교각을 놓고 나면 홍수가 쓸어갔다. 이 터에서 사냥을 즐기던 세종(재위1418~1450)의 상왕(정종 태종)은 몇년의 시차를 두고서 세상과 인연을 마쳤다. 따라서 다리도 필요 없게 되었다. 듬성듬성 교각 몇 개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둔 세월이 오십여년 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한양에서 강원 충청으로 가는 교통요충지다. 그래서 다시 공사를 재개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성종(재위1469~1494) 때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다리 가운데 가장 길다고 한다.

다리 만드는 일은 당시로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였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초빙한 전문가는 승려였다. 남들로 하여금 시냇물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는 선행은 월천공덕(越川功德)을 짓는 공익을 위한 일인지라 당신도 기꺼이 응했다. 얼마나 다리를 잘 만들었는지 평지를 걷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여 성종은 ‘제반교(濟盤橋 반석 같은 평평한 다리)’라고 이름 지었다. 돌다리를 만드는데 대청마루 까는 공법을 도입한 뛰어난 응용기술 소유자였던 것이다.

화살곶다리. <한겨레> 자료 사진

성종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인물이던 성현(成俔 1493~1504)선생은 <용재총화>권9에 이 사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떤 승려가 일찍이 화살곶다리(箭串橋)를 구축하였다. 많은 돌을 체벌하여 대천(大川)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300여보를 넘었다.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았다.”

또 그로부터 300여년 후의 인물인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성종 14년 승려들이 흥인지문 밖의 화살곶(箭串)에 다리를 놓았는데 왕이 제반교라 명명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다리를 만들었던 스님의 법명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참으로 유감스럽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의 ‘불교성지’라는 사실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별다른 공익적 의미도 없는 곳에 ‘서학성지’라는 안내판을 두루 남발하던 관료들의 무모함도 이 다리 앞에선 신중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야말로 야사에 불과한 ‘태조가 함경도에서 돌아 와 여기까지 마중 나온 이방원이 미워서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만 몇 줄 늘어놓았다. 이제라도 ‘화살곶다리(箭串橋)’ 뿐만 아니라 ‘제반교’ 전후사정의 내용을 더하고 다리이름도 병행하여 기록한다면 후세사람으로써 전임 시공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이 될 것이다. 한글세대에 맞추어 ‘살곶이다리&대청마루다리’도 괜찮겠다.

일체 불필요한 장식은 물론 난간조차도 없는 실용형 다리는 강물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이다. 훼손과 유실을 거쳐 현재 옛다리 끝에는 새로운 콘크리트 다리가 덧대어져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 쪽은 대학 건물에 가로막혔고 맞은 편은 강변도로 폭만큼 지하도를 뚫어놓았다. 통행을 위한 기능용 다리가 아니라 ‘역사관광용’ 다리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살곶이다리의 중랑천 상·하류 양방향을 살펴보니 얼추 네다섯개의 새로운 현대식 다리가 물류와 교통편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옛다리만 부분적으로 폰카에 제대로 담아 보겠다고 강 이쪽저쪽과 다리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곳에서도 완전체로 잡히는 곳이 없다. 그동안 지형지물의 변화가 심했다는 반증이리라. 결국 멀리 떨어진 전철용 다리 곁의 인도로 올라갔다. 원경이긴 하지만 옛다리와 이어진 새다리 그리고 주변 현대식 다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전문가용 카메라가 없으면 옛다리만 잘라서 찍을 수도 없겠다. 밀짚모자를 단단히 여미고서 도시의 텁텁함이 묻어나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두 눈에 야무지게 담았다.

정작 본래다리 밑으로는 물이 흐르지 않고

옛 다리 아래 푸른 갈대 위로 바람만 흐르더라.

아니 풀밭 위로 다리가 흐르고 있더라.

글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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