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비싼 거리에 오래된 서점이 있는 이유
영국 런던의 지명이나 거리 이름은 고구마 같다. 땅을 파야 고구마를 캘 수 있듯 이름 아래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알아야 이해된다. ‘코번트가든’이라는 지명을 처음 듣고는 공원인가 했다. 천만에, 런던 최고의 쇼핑거리다. 13세기 수도원으로 시작해 1666 년 런던 대화재 이후 도로가 정비되며 이탈리아풍 저택이 들어선 광장으로 변했다 . 한때 런던 최대 청과물시장과 꽃시장이 있었다. 코번트가든 입구에는 이를 기념하는 꽃마차가 있다.
세실코트가 해리포터의 무대 ‘다이애건 앨리’로
코번트가든과 바로 이어진 ‘세실코트’라는 좁고 짧은 상점 거리도 비슷하다. 18세기 모차르트가 세실코트에 머물렀다거나 영국 영화산업 초창기의 제작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파가 가득한 레스터스퀘어에서 잠시 걸어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면 사뭇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마치 빅토리아시대로 돌아간 듯 그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세실코트 상점 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주로 1820~1920년대 조명기구 , 20 세기 유럽의 회화 , 고지도 , 메달 등을 취급하는 앤티크 상점이 모여 있다. 이런 이유로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거리 ‘다이애건 앨리’를 창조할 때 세실코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세실코트가 더 특별한 건 개성 있는 서점들 덕분이다. 이곳에 18 세기 초부터 서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니 인근 채링크로스보다 더 오래된 서점 거리다 . 물론 그 시절 세실코트의 서점은 주로 정치 팸플릿을 인쇄해 판매했다. 지금 세실코트의 서점들은 전문 분야의 도서를 취급하며 희귀 서적 혹은 현대 미술 분야의 아방가르드(전위) 출판물을 전시·판매한다.
세실코트의 터줏대감이라 할 왓킨스서점(Watkins Books)부터가 그렇다. 1893 년 3 월 , 존 왓킨스가 서점을 시작한 이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백 년이 넘게 세실코트에서 영업하고 있다 .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왓킨스서점을 즐겨 찾았고 , 동화 < 제비호와 아마존호> 시리즈로 유명한 아서 랜섬이 출판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시절 단골로 방문했다.
왓킨스는 영성서적 전문 서점이다. 마음과 관련한 모든 책을 다룰 뿐 아니라 부적, 타로 , 보석 , 명상 쿠션 , 요가 매트 , 부처 조각상 등까지 구비하고 있다 . 특히 타로 컬렉션은 왓킨스 서점의 자랑이다 . 서울 금호동에 있는 카모메책방은 ‘타로 카드로 당신을 읽습니다 . 그림책으로 당신을 위로합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자를 만난다 . 이런 콘셉트 서점의 원조가 왓킨스다. 원한다면 왓킨스서점을 방문한 김에 타로점을 볼 수 있다.
영성책은 왓킨스, 어린이책은 마치페인
런던을 찾은 여행자라면 협소한 세실코트보다 코번트가든에서 쇼핑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루이스 캐럴이나 로알드 달처럼 좋아하는 어린이책 작가가 있다면 혹은 초판본을 수집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89 년 문을 연 마치페인 (Marchpane) 은 주로 18~20세기에 출판된 어린이책을 취급한다 . 특히 루이스 캐럴의 책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판매한다 . 마치페인은 루이스 캐럴의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와 < 거울 나라의 앨리스> 판본을 수백 가지 보유한 서점으로 이름났다.
예컨대 1924년 나치 치하 유대인이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를 히브리어로 번역해 단 2 천 부만 발행했다 . 아서 래컴을 포함해 세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담긴 이 희귀 도서의 가격은 무려 5 천파운드 . 우리 돈으로 8 00만원이 넘는다 .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려주는 마치페인의 주인은 매슈 이브로 옥스퍼드대학에서 예술사 박사 학위를 받은 프리랜서 전시 큐레이터이자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 전문가다.
세실코트의 골즈버러서점(Goldsboro Books)도 국내에서 만나기 어려운, 흥미로운 서점이다. 작가 사인이 담긴 양장본 초판본만 전문으로 판매한다 . 도서 수집가이던 데이비드 헤들리 와 대니얼 게디언 은 자신들이 수집한 초판본으로 거래를 시작했다 . 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은 뒤 1999년 서점을 열었다.
수집용 앤티크 서적의 가격은 만만치 않다. 잠금장치가 달린 유리 책장에 책들이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저렴한 축에 드는 마틴 에이미스가 1975년 발표한 소설 < 죽은 아기들 > 의 초판본이 250 파운드 ( 약 40 만원 ) 이다 . 희소성이 클수록 가격은 치솟는다 . 애거사 크리스티의 < 아기돼지 다섯 마리 > 는 1500 파운드 ( 약 250 만원 ), 이언 플레밍의 < 문레이커 > 는 6500 파운드 ( 약 1 천만원 ) 이다 . 다만 북클럽 회원이 되면 신간 서명본을 20 파운드 ( 약 3 만 2 천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주변 상점보다 낮은 임대료 받는 세실 가문
세실코트의 전문서점은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독자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책의 존재를 귀히 여기고 즐기는 문화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 런던의 임대료는 살인적이다 . 희귀 도서가 아무리 고가라도 마치페인이나 골즈버러 같은 서점이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을까 . 30 년 넘게 한자리에서 서점을 지속한 비결은 뭘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 답이 있었다.
세실코트는 7대 솔즈베리 후작인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이 이끄는 세실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소유주는 체인 상점이 아닌 개성 있는 독립 상점들이 세실코트에 존재하기를 바라며 주변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세를 놓고 있다. 자본주의의 나라 영국에서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선의가 세실코트의 전문서점이 살아남은 또 다른 이유였다.
글·사진 한미화 <동네책방 생존탐구> 저자
*안녕, 유럽 서점: 유럽의 서점을 돌아보며 우리 서점의 내일을 생각해본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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