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원래, 법치주의는 '권력'을 '통제'하는 원리이다

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2023. 6. 12. 07: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여러 해 전 TV토론에서 경제학 전공자인 한 논객이 '법치주의'를 말했다. 그러자 판사 출신인 상대방 토론자가 "동의한다. 성숙한 시민사회로 가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화답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경제학 전공자도 놀라며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국민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법치주의인가, 법치주의는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나라를 운영하고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구구절절하게 지당한 말이었고, 판사 출신은 한동안 법치주의에 관한 '강의'를 조용히 들어야만 했다.

그렇다. 법치주의란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국가 혹은 권력자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거나 국민에게 의무를 부과할 때에는 반드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로써 해야 하고, 사법·행정작용도 법률에 근거를 둬야 한다는 원칙을 법치주의라 한다. 이를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법적 안정성과 생활의 예측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기에 처음 역사에 등장한 13세기 이래 중요한 민주주의의 실천원리로 강조돼 오고 있다. 모든 국민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원리가 아니다. 하는 일이 죄인을 처벌하는 일이다보니 법을 지키고 어기는 것에만 눈이 가는 판사라 해도, 민주국가 원리의 기초고 오랜 학창시절 동안 누누이 배웠을 법치주의의 의미를 저리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프닝이었고,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일일 것이라고 위안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올해 대통령 신년사에서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것이 노동개혁이다. 그런데 노동개혁의 출발점은 '노사 법치주의'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불필요한 쟁의와 갈등을 예방하고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까지 정당화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도 했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법치주의를 복원·관철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치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원래 노동기본권과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이 충돌하는 문제는 헌법학에서 '기본권의 상충(相衝)'이라는 주제로 논의되는 사항일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법치주의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호출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법치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집회와 시위에 대한 강경일변도 대응을 정당화하고 독려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해 거부할 수 없는 원리인 법치주의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될 위험이 현실화되고 삶의 전면에 등장한 셈이다.

불법 집회, 불법 시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집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엄정하다는 것이 최루액(캡사이신)을 뿌려대고, 안전난간도 없는 고공(高空)의 좁다란 발판에 서 있는 사람을 피가 나도록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한 물리력이 행사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조치와 대응이 필요할 것인지는 법규와 매뉴얼에 따라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현장에서 판단돼야 한다. 고도로 훈련된 경찰이 단호하면서도 냉정하게 법을 집행하면 된다. 대통령이나 경찰청장이 맞지도 않는 '법치주의'라는 용어로 현장의 경찰관과 국민을 잘못된 인식으로 빠뜨려서는 아니 된다. 권력자들이 이런 식으로 법치주의를 참칭해 경찰관의 눈을 가리고 강경대응만을 부추기면, 경찰관도 사람인지라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 퇴행이며, 문명의 퇴화이다. 암울한 시대로 복귀하는 수단으로 '법치주의'를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법치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위 노동자나 국민에 대한 규범이 아니라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퇴행'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의 권한남용을 통제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Copyright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