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올레는 발걸음을 먹고 자란다
새로운 길을 맞이하고 오랜 길의 안녕을 염원하며 마음껏 걸었다.
●마쓰우라·후쿠시마 코스
과감한 쉼표
수만 가지 초록을 깨달은 계절이 있었다. 저마다 다른 색을 지닌 나무들이 바람 한 점에도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던 시각, 의도적으로 발걸음을 지연시키며 만났던 찬란한 그라데이션. 정처 없이 마냥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던 어린 날의 어느 순간…. 추억은 옅어지고 가끔은 짧은 산책마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할걸. 하루 24시간이 유독 짧게 느껴질 때면 효용성에 매몰되어 한숨처럼 얕은 아쉬움을 뱉는다. 바쁜 삶의 초조한 줄다리기에 개미를 자처하기도, 기꺼이 베짱이가 되기도 하는 날의 연속이다. 사실은 마음 놓고 편히 걸어도 된다며 과감하게 스위치를 꺼줄 계기가 고팠다. 규슈올레는 흔쾌히 마음에 쉼표를 찍어 주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리듯 땅 위의 길을 연결했다. 올레는 제주어로 큰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데, 자연과 마을을 꼬닥꼬닥(천천히) 걸어야만 비로소 깨달음을 준다. 이를테면 길 위에 사는 사람들과 길을 내어준 자연의 이야기, 여기저기 바삐 스쳐 지나갈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감각들. 두 발로 구석구석 걸어 본 이들이 금세 매료돼 올레꾼을 자처하는 이유다.
규슈는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주요 섬 중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다. 후쿠오카공항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 남짓. 이리도 가까운 곳에 우리에게 더없이 친숙한 제주올레의 11년 넘은 자매가 있다. 모든 코스가 이어져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제주올레와는 달리 규슈올레는 각 지역의 주요 명소를 중심으로 한 길이 섬 곳곳에 흩어져 있다. 현재 18개의 코스가 운영 중인데, 지역, 난이도, 여행 테마에 따라 선택지는 다양하다.
올레꾼들의 발길이 줄었던 코로나 기간 동안 일부 코스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틔우는 봄의 생명력처럼 고맙고 기특하게도 새로운 길을 선보였다. 올해 3월 개장한 마쓰우라·후쿠시마 코스가 그 주인공이다.
후쿠오카공항에서 나가사키현 마쓰우라시 후쿠시마까지는 차로 약 1시간30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후쿠시마가 아니다. 이름이 같을 뿐, 수십 차례 일본을 여행한 일행도 첫 방문일 만큼 작은 섬 속의 섬마을이다.
길에 담은 마음
"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또래 일본인 친구가 생겼고, 엄마보다 더 큰 배낭을 멘 듬직한 꼬마 신사와는 나란히 걸었다. 때로는 말과 몸의 언어이기도 그저 미소이기도 한 여러 모양의 이야기가 길 위를 떠다녔다. "올레는 자연과 문화만을 즐기는 길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교류하는 길"이라는 제주올레 '안은주 대표'의 말이 와닿았다.
섬마을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시작으로 마쓰우라·후쿠시마 코스는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동심으로 에너지를 가득 충전했건만 이내 위기에 봉착했다. 이쯤 되면 내리막이 나올 법도 한데 오르고 또 올라도 길은 여전히 하늘을 향했다. 올레길은 모두 평지인 줄 알았는데. 역시 속단은 금물이다. 초반에 오르막이 긴 중상 난이도의 길은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겉옷을 벗게 했다.
이윽고 완만한 길이 나타나 한숨 돌리며 울창한 나무 사이를 걷다 보니 오야마공원에 도착했다. 800여 그루에 달하는 벚나무가 분홍빛 절경을 선물하는 벚꽃 명소로, 3월과 10월 일 년에 두 번 벚꽃이 핀다. 요새를 닮은 전망대에 오르면 온 세상을 발아래 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로하섬'이라 일컫는 크고 작은 48개의 섬 군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동글동글 바다 위에 퐁퐁 솟은 섬들의 아기자기함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출출하던 차에 고소한 냄새가 났다. 마쓰우라시 봉사자들이 특산물인 전갱이를 즉석에서 튀겨 올레꾼들의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따끈한 튀김이 입에 들어오자마자 살살 녹는다. 곳곳에 마련된 푸드트럭에서 신선한 해산물 간식을 계속 주니 도무지 배고플 틈이 없다.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일본 특유의 환대(오모테나시) 문화 덕에 운동량과 섭취량이 정비례했다. 엄청난 포만감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다채로운 풍경이 따라온다. 한적한 어항구에서는 따사로운 햇볕에 멸치가 바싹 말라가고, 해안 산책로에서는 잠수함을 닮은 바위를 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산과 밭을 누비다 다소 헷갈리는 야생 그대로의 길을 만나도 당황하지 말고 안내표지를 찾아 나아갈 것. 길은 밟을수록 성장하고 누군가의 발자국은 훌륭한 비료가 될 테다. 약 10km의 여정 끝에 하이라이트인 도야 다랑이 논에 도착했다. 매년 모내기철(4월 중순~5월 초순)이면 물이 찬 계단식 논에 석양이 비쳐 황홀한 붉은빛을 선사한다. 걸어 보니 알겠다. 이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아두면 좋은 규슈올레 안내표지
간세
제주올레의 상징인 조랑말의 이름. 규슈올레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기점에서 종점으로 정방향으로 걷는 경우 간세 머리가 향하는 쪽이 진행 방향.
리본
푸른 바다를 닮은 파란색 리본과 일본 신사의 토리이(문)를 상징하는 다홍색 리본을 한데 묶었다. 멀리서도 눈에 잘 띄도록 주로 전봇대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화살표
파란색 화살표는 정방향으로 걸을 때의 진행 방향을, 다홍색 화살표는 역방향으로 걸을 때의 진행 방향을 가리킨다.
●다케오 코스
발걸음이 불어넣은 생명력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낙관적인 길치의 신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갈 테니 잠시 길을 잃어도, 조금 둘러 가도 모두 하나의 여정인 것이다. 올레는 그런 점에서 참 신기하다. 때때로 직선으로 나아가면 이내 닿을 곳을 굳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보여 준다. 다케오 코스가 유독 그랬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작은 개울이 나오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청설모가 나무 위를 기어다니고 부지런히 걷다 보면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어논다. 구태여 비효율성을 자처하는 길 위에서 유한한 시간을 곱씹었다. 기꺼이 내던졌던 모든 비효율적인 즐거움의 순간을.
다케오 코스는 2012년 개장한 첫 규슈올레 코스이자 인기 코스다. 규슈올레의 최고참인 셈인데, 다케오온천역이 시작점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도심과 자연을 수차례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재미가 있다. 차들이 달리는 대로변을 지나 옹기종기 가정집이 자리한 골목을 누비다 자연을 맞닥뜨렸다. 숲속을 걷다 만난 기묘지절에서는 올레꾼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과 간식을 내어줬다. 코로나 전과 변함없는 따뜻한 인사가, 단절됐던 시간을 무색하게 했다.
다시 마을길을 걷다 언덕을 오르니 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이케노우치 저수지는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625년 축조한 곳으로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역시나 이번에도 쉽지 않다. 마쓰우라·후쿠시마 코스에 이어 산악 산책로가 또다시 등장했다. 땀을 훔치며 정상에 오르자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다케오시 전경이 어우러진다. 작은 호수 속 정자를 품은 섬을 지나니 꽤 가파른 길이 나왔다. 절경은 눈으로만 담기로 하고 카메라를 들던 두 손에 자유를 줬다. 산 중턱에서 위와 아래를 번갈아 본다. 상쾌하다. 숨이 트인다.
후반부로 접어들면 다케오 코스의 하이라이트가 연이어 나타난다.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의 모델인 다케오시립도서관은 책을 읽으며 문화체험까지 가능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넓은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과 자연광이 은은하게 비추는 목조 인테리어가 아늑함을 자아낸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케오 신사로 향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무려 3,000년 이상 자리를 지킨 녹나무가 위용을 과시했다. 높이는 30m, 둘레는 20m로 압도적인 생명력을 뿜어낸다. 붉은 다케오온천 누문에서 코스는 마무리된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선명한 색채로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까지 인증 사진을 찍는 이들로 붐볐다.
길을 걷는 사람이 행복한 길, 길 위에 사는 지역민이 행복한 길, 길을 내어준 자연이 행복한 길. 올레는 지금도 수많은 발걸음을 먹고 자라는 중이다.
글·사진 이은지 기자 취재협조 규슈관광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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