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경사노위에 노동개혁을 맡길 수 없는 이유

여론독자부 2023. 6. 1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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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가장 두드러진 점은 농림어업 취업자가 18만5000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제조업 취업자가 21만6000명 감소한 것과 대비되면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도가 아니라 탈산업으로 농업국가를 지향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근로자의 협동체인 노조의 대표와 사용자 연합체의 대표 그리고 정부의 대표가 모여 원칙을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합의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장(venue)을 제공하는 것이 경사노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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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노·사·정 '대화로 합의'는 비현실적
개혁 대상 노조가 '주체'될 수 없어
국가-사적 자치 구분없는 경사노위
국민 원하는 합의도달 기대 어려워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경제]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가장 두드러진 점은 농림어업 취업자가 18만5000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농림어업 취업자는 1998년 경제위기 후 2016년까지 매년 6만2000명씩 추세적으로 감소해 왔으나, 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부터 증가세로 돌아선 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제조업 취업자가 21만6000명 감소한 것과 대비되면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도가 아니라 탈산업으로 농업국가를 지향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런 추세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풀 꺾이고 있어 경제가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된다. 윤 정부가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법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폭력적 시위에 대한 정당한 법 집행에 반발해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참여를 전면 중단했다. 이참에 우리는 경사노위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노?사?정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와 타협으로 노동개혁의 합의에 도달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난 25년간의 노사정위원회 운영의 결론이다. 노동개혁의 핵심은 노동조합이 그 힘을 과도하게 휘두르는 것을 억제하고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의 대상인 노조가 경사노위를 무대로 개혁의 주체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한국의 노동법은 임금과 고용 등 모든 면에서 이미 취업한 근로자(인사이더)에게 매우 유리하고 직장을 찾고 있는 미래의 근로자(아웃사이더)에게 매우 불리하다. 기득권자인 노조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에게 백해무익한 노동개혁에 동의하라는 것은 노조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사노위의 이론적 토대인 사회적 합의주의(corporatism)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세포가 모여 조직을 이루고 조직이 모여 한 유기체를 형성하듯이, 개인이 기능적 동질성에 따라 협동체를 이루고 협동체가 모여 사회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근로자의 협동체인 노조의 대표와 사용자 연합체의 대표 그리고 정부의 대표가 모여 원칙을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합의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장(venue)을 제공하는 것이 경사노위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사회의 목적 또는 협동체의 결정에 의해 억압되거나 제한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합의주의의 결말은 전체주의이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에크 교수는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는 ‘노예의 길’이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경사노위의 더욱 큰 문제는 국가의 정책적 판단에 노총, 경총 등 사적 이익집단들이 직접 참여할 뿐만 아니라 결정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영역과 사적 자치의 영역이 엄격히 구분되어야 국가가 객관적 입장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경사노위를 통해 두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지니 이상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축구 경기에서 양 팀의 선수 대표와 심판이 어우러져 경기의 규칙을 정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 대표도 진정한 의미의 대표가 아니다. 이런 경기라면 누가 돈을 내고 관전하겠는가. 그러나 우리 국민은 경사노위에 매년 수십억 원의 예산, 청사, 파견 인력 등의 기회비용을 지불하면서 허망한 결과를 보고 있다. 경사노위에 노동개혁을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과 진배없다.

여론독자부 opinion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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