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생활 70년' 벽안의 두봉 주교 "한국인, 고통 이기는 힘 있다"
소년기 2차대전 겪고 프랑스서 한국전쟁 직후 부임
박정희 시절 '오원춘 사건'으로 추방 위기 맞기도
(의성=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남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 하면 자기가 행복해요. 내가 행복을 누려야겠다고 하면 행복하지 않아요."
소년기에 2차 대전을 겪고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에 와서 햇수로 70년째 천주교 성직자로 활동하는 프랑스 출신 두봉(94) 주교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을 묻자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전쟁 직후의 한국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착했고 순수했으며 "내일 먹을 것이 없더라도 이웃 사람이 못 먹고 있으면 음식을 나누어 줬다"고 떠올렸다.
두봉은 1953년 6월 29일 수품했다. 그가 사제가 된 지 70주년이 다가오는 것을 계기로 경북 의성군에 있는 거처로 찾아가 근황을 들었다.
천주교의 한 공소(公所)에서 생활하는 두봉 주교는 오랜 한국 생활 과정에서 맺은 인연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신학교 등에서 강의를 요청하기도 하고, 각종 의식에 참가하거나 지인의 부탁을 받아 기꺼이 도와주러 가기도 한다.
원로 사목이지만 한 달에 한 번은 마을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거실 겸 공소 내 성당에서 직접 미사를 주례한다.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텃밭을 돌보려면 시간을 쪼개야 할 정도였다.
기자가 인터뷰하러 간 이달 6일에도 50대 정도로 보이는 면식 없는 부부가 불쑥 찾아와 15분 정도 두봉 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다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유명세가 일상의 평온을 방해하는 지경이었지만 그에게는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뿌리칠 매정함이 없었다.
두봉 주교는 기자가 떠날 때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걸어서 직접 배웅했다. 그는 최근에 청력이 나빠져 보청기를 사용하고 시력도 예전만 못하다며 "떠날 때가 다가온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걸음걸이는 젊은 사람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속도였다.
'벽안(碧眼·파란 눈)의 신부'로 한국에 온 노(老) 성직자의 눈동자는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그는 이미 지역 사회의 어른이었다.
운전기사는 버스에 오르는 기자를 지켜보던 두봉 주교를 바로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 가입시다(갑시다)!"
농담 섞인 인사에 두봉 주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봉은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살 때인 1939년 2차 대전에 발발해 어려운 청년기를 보냈다.
한국 전쟁 때 의무 복무 중이었던 두봉은 한국 파견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신부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지원하지 않았다. 군 시절 친구가 참전했다가 한반도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한국을 새롭게 인식했다.
1950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들어갔고 한국전쟁 휴전 직전에 근무지가 한국으로 결정됐다.
두봉은 1954년 12월 한국에 왔다. 대전 대흥동천주교회에서 10년간 보좌로 사목했으며 대전교구 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등을 지냈다.
1969년 7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해 1990년 12월 2일 퇴임할 때 21년 남짓 교구를 이끌었다.
'가난한 교회'를 내걸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강조했다.
교구장 재임 시절인 1973년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이 개원했고 1978년 12월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했다.
1978년 발생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두봉 주교의 지향을 잘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천주교 신자이며 농민회 영양군 청기 분회장이던 오원춘 씨가 '영양군이 감자 경작을 권장했지만, 종자가 불량해 싹이 나지 않는다'며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항의에 나선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당국은 초기에는 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했으나 이듬해 초 안동교구 사제단이 지원에 나서자 결국 피해를 보상했다.
하지만 이후 오씨가 괴한들에게 납치·폭행당했고 사제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정부와 천주교가 대립하는 시국사건으로 번졌다.
외무부가 자진 출국 명령을 내리면서 두봉 주교는 위기를 맞았다.
두봉 주교는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걱정하고, 힘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당시의 선택을 회고했다.
그는 1979년에 바티칸까지 가서 자신의 신념을 설명했다.
결국 교황은 두봉의 손을 들어줬고 한국 정부와 맞섰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두봉 주교는 교육 기반 확대를 위해서도 힘썼다.
교구장 부임 직후인 1969년 12월 안동교구는 학교법인 상지(上智)학원을 설립했고, 산하에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상지전문학교(현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중, 상지여자상업고등학교(현 상지미래경영고등학교)를 개교했다.
두봉 주교의 프랑스 이름은 르레 뒤퐁, 가톨릭 세례명은 레나토이다. 2019년에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국적 증서를 받으면서 한국·프랑스 이중국적자가 됐다.
다음은 두봉 주교와의 일문일답.
--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 내가 TV에 나왔다는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 많다. (그는 2022년 1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다) 대부분의 경우 (가톨릭) 신자다. 그런데 신자가 아닌 사람도, 스님도, 목사도 찾아온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많다. 이메일 보내거나 편지 보내는 사람도 많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도 많다. 내 나이 또래의 대부분 사람은 가만히 집에서 시간을, 심심한 세월을 보내는 데 나는 정반대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취미 삼아 (마당 텃밭에서) 농사를 조금씩 한다. 점심은 준비해주시는 분이 있고 아침과 저녁은 내가 알아서 먹는다. 그것이 나로서는 편하다. 이번 달에는 피정(避靜·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도 할 예정이다. 일주일 정도 신학대학 학생, 교수들과 피정의 집에 들어가서 강론하기도 면담한다.
- 두봉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 대전에서 지낼 당시 '원 주교'(원형근 아드리아노 주교)라고 불리던 외국 분이 대전교구장이었다. 그분이 발음이 비슷하다며 '두' 신부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했다. 막을 두(杜)자인데 '봉'은 내가 모시던 본당 신부님이 중국에 '두보'(杜甫)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다면서 두견새 두(杜)에 봉우리 봉(峰)을 써서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와 같은 시적인 이름이 좋지 않겠는가 제안해서 내가 받기만 했다. 두봉은 나의 성(姓, 뒤퐁)과 비슷한 발음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드봉'이라고 부른다. 화장품 이름(브랜드)이다. 지금도 편지에서 나를 드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 프랑스 출신이지만 한국 생활을 정말 오래 했다.
▲ 나는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두 가지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중 국적을 보유할 수 있게) 법무부가 조치를 해줬다. (어떤 사람은) 나를 외국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한국말을 아십니까', '글을 읽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식사를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웃음) 나로서는 (질문이) 우습다.
-- 1929년생이면 전쟁을 겪고 고생도 많았을 것 같다.
▲ 10살 때인 1939년에 2차 대전이 시작됐다. 나와 내 동생은 양팔을 뻗은 길이가 180㎝쯤인데, 키는 160㎝ 정도밖에 안 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 정도는 제대로 먹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돼지감자를 많이 먹었고 빵도 조금씩밖에 얻을 수 없었다. 고기는 거의 먹지 못했다.
--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는.
▲ 6·25가 났을 때 나는 저쪽(유럽)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든 청년이 1년 동안 군 생활을 하게 돼 있었다. 프랑스 정부에서 (한국에) 파병을 결정했고 가고 싶으면 지원하라고 했다. 나는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신부가 되기 전이라서 지원을 안 했다. 그런데 군에서 만난 친구가 지원했고 한국에서 전사했다. 그것이 한국과의 첫 인연이다. 나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한국으로 발령을 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사제)품을 받은 것이 1953년도였는데 아직 전쟁이 계속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한국으로 발령받았다. 어른들은 곧 휴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 발령 소식에)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 한국에 가면 친구의 영혼이라도 만날 것 같은 기분이었는지.
▲ 나는 세상일에 우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하나하나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고 믿는다. 내가 (한국 파병에) 지원하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고, 발령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닌 하늘의 뜻이었다. 하늘의 뜻이라면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 다른 기쁜 이유가 있었는지.
▲ 전쟁 중 한국을 위해서 기도를 한 바가 있었다. 도와줘야 할 사람이 참 많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 피난민, 고아가 많을 것이고 일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이 많은,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그런 나라가 더 좋다. 지금도 한국 선교사들이 외국에 나가는데 이왕이면 어려운 나라로 가고 싶어 한다. 잘 사는 나라에 선교사로 나가고 싶은 사람 없다. 일거리가 많고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데로 가고 싶어 한다.
-- 일거리가 많을 것이라서 기쁘게 생각했다는 것인지.
▲ 그렇다. 내가 속한 대전교구 본당 신부님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고아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성당에 방을 얻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교구청에서 5∼10분 거리에 방을 얻었다.
-- 한국에 가라는 이야기는 1953년에 들었는데 실제 온 것은 1954년이다.
▲ 1년 후에 온 이유는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업을 마치고 그 다음해(1954년) 12월 한국에 왔다.
-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은.
▲ 그때는 가난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먹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양식을 보냈다. 정부가 (받은) 밀가루, 강냉이 가루를 나눠 줄 능력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그것을 나눠주라고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이왕이면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라고 했다. 병원이 별로 없었고 외국인이 한국말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다. 길거리 사람들이 남녀 구분 없이 가장 많이 입은 옷이 군복이었다. 그만큼 생활이 어려웠지만 참 진솔했다. 6·25 때 외국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남한은) 공산화가 되지 않았다. 일반인도 외국인을 좋게 생각하고 어디를 가도 묻는 것이 있으면 대답을 잘해주고, 친절하고 착했다. 못사는 사람들은 서로가 잘 도왔다. 내일 먹을 것이 없더라도 이웃 사람이 못 먹고 있으면 음식을 나누어 줬다. 어려운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웃을 줄 알았다. 애들은 참 재미있게 놀아서 첫인상이 아주 좋았다. 이건 내가 그냥 적당하게 (좋은) 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확실히 아주 착했고 순수했다. 그렇다고 도둑이 없었더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인상이 아주 좋았다.
-- 일상이 역동적이었을 것 같다.
▲ 사회가 굉장히 좋아졌다. 잘 사는 나라, 선진국이 됐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옛날만 못하다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자기를 생각한다. 개인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어려운 사람들끼리는 '내가 우선 손해를 보지 말아야 하겠다' 혹은 '내가 얻을 것을 다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잘 안 한다. 함께 사는, 서로 도와주는 면은 (요즘) 우리가 옛날 사람들만 못하다.
-- 안동교구장 시절 가톨릭농민회를 조직해 약자를 지지하거나 권력에 저항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지금과는 상황이 확실히 달랐다. 어려운 사람, 근로자, 농민, 고통받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힘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나도 농촌 출신이지만 농민회 조직을 뒷받침해줬다. 용기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농협 지도자는 회원들이 뽑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정부 정책을 수용하는 사람을 임명하곤 했다. 농민들은 '우리가 뽑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농민회를 장려했다.
-- 농협의 씨감자에서 싹이 나지 않는 것에 항의한 농민 오원춘 씨가 당국에 의해 감금 폭행 당한 이른바 '오원춘 사건'으로 추방 위기가 있었는데.
▲ 오원춘 사건의 경우 싸우고 싶은 생각, 힘으로 맞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나서는 그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한국 정부 측에서는 외국인이 나라의 정책에 간섭하고 있다고 했다. 순종하지 않거나 항의하는 사람을, 여러 선교사를 많이 추방했다. 나도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프랑스 국적자이고 천주교 안동교구장이었으므로 프랑스 대사와 주한 교황 대사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다. 프랑스 대사는 가만히 있었으나 교황청 대사가 즉시 외무부 장관을 찾아가서 항의했다. 한국과 바티칸의 합의가 있으니 어려움이 있으면 상의해야지 일방적으로 내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로마로 돌아가서 내 입장을 설명했다.
-- 이후 상황은.
▲ 로마 교회 안에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말썽을 부리는 주교가 있으면 안 된다. (그런 주교가) 사표를 내면 그것으로 해결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반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제안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때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그는 두봉 주교가 잘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일방적으로 한국 정부가 추방하면 다른 사람을 안동교구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교황을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사회가 매우 복잡한 상태였고 긴장 상태였다. 한 달도 안 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당했다. 그 이후 나를 내보낸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비결은 무엇일까.
▲ 한국의 저력이라고 할까. 한국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봐도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잘 극복한 나라다. 연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스스로 '발전해야 하겠다', '달라져야 하겠다', '그대로 남아 있으면 안 되겠다'라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한국의 특징이라고나 할까.
-- 한국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자살률도 높다.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힘이 되는 얘기를 한다면.
▲ (구미 미래로병원에서 상담 활동을 하는 이춘자 수녀가 기획해 펴낸 단행본 '힘내! 너만 아픈 게 아니야'를 소개하며) 그런 사람들에게 권할 책이다. 어려움을 극복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실망하고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해서 만든 책이다. 과거 6·25 때는 아주 형편없는 나라였는데 그래도 극복했다. 어려움이 있다고 포기하고 자살하면 안 된다.
--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
▲ 행복은 주관적이다. 외부 조건에 달리지 않았다. 돈 가졌다거나 건강하다는 것,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행복이 달리지 않았다. 남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만족감, 행복이 따라온다. 어려움 없이 나만 생각하면 행복할 수는 없다. (이런 방식을) 봉사라고 해야 할까, 이웃에게 베푼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남에게 행복을 준다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남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 하면 자기가 행복하다. 내가 행복을 누려야겠다고 하면 행복하지 않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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