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문이 열리면

김담이 동화작가 2023. 6. 12. 03: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담이 동화작가

이야기는 항상 집에 있었다. 어릴 적 집은 수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보물 창고였다. 나는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집이 좋았다. 나는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수집하는 어린 수집가였다.

내가 살던 집은 정원이 딸린 2층 양옥집이었다. 2층으로 지어졌지만, 가족이 사용하는 공간은 1층뿐이었다. 2층은 세를 놓기 위해 계단을 밖으로 뺀 독립된 공간으로 비어 있었다. 나는 2층을 무서워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산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방엔 길게 빛이 들었다. 어두운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2층이, 방이 무서워 숨죽이고 조심조심 들어갔다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오래 머물면 나가는 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어나오는 때가 많았다. 2층은 자주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주로 1층과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층엔 세 개의 방이 있었지만 내 이야기 속의 방엔 또 다른 방들이 있었다. 오직 나만 들어갈 수 있는 방. 나에게만 문이 열리는 방.

내겐 아주 특별한 장롱이 있었다. 안방의 벽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몸집이 큰 장롱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물건이면서 나보다 나이도 많고 미닫이문이 덜컥거리며 열리지 않아 온 힘을 다해 용을 써야 할 때도 있었다. 장롱엔 두껍고 폭신한 솜이불이 식빵처럼 층층이 포개져 있었다. 그땐 장롱은 이불만 넣는 것인 줄 알았다. 장롱과 옷장은 다른 것인 줄 알았다. 장롱은 이불을 넣는 가구를 의미하고, 옷장은 옷을 넣는 가구를 의미하는 다른 쓰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식구가 많아 안방 장롱이 이불로 가득 채워졌는지 모르고 장롱은 이불을 넣는 가구의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안방에 놓여 있던 장롱은 고동색이었다. 장롱으로 완성된 순간부터 이미 100년쯤 나이를 먹고 낡아버린 것 같은 고동색. 나는 고동색 장롱을 좋아했다. 층층이 쌓여 있는 솜이불 위에 누우면 구름 위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장롱에 숨어 어머니가 찾는 소리를 모른 척했다. 어머니 목소리는 안방을 훑고 장롱 앞까지 다가섰다 문밖으로 멀어졌다. 코앞에 있는 나를 찾지 못하고 애태우는 게 재밌어 숨죽이고 있다 조용해지면 준비물을 꺼냈다. 손전등을 켜고 누워 동화책을 펼치면 기분이 몽실몽실해졌다. 나는 장롱에서, 나만의 방에서 앨리스와 모험을 시작하고, 파트라슈와 들판을 달리며 생각했다. 장롱 뒤편에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문을 통해 수많은 방에 사는 친구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레는 일이었다. 정말 장롱 뒤편에 자그마한 문이 생긴 것 같아 뒷면을 조심조심 만져 보기도 했다. 그리고 문고리가 없는 단단한 면이 만져지면 ‘특별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쉽게 열릴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며 매번 아쉬워했다.

그날도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들고 장롱으로 들어갔다. 노란 표지가 눈에 띄는 책이었다. 나는 그날의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동화책은 귀신 이야기보다 무서웠다. 동화책은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었다. 옷장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간 네 남매는 하얀 마녀를 만났다. 하얀 마녀는 아이들과 동물을 무자비하게 얼려버리고 괴롭혔다. 하얀 마녀가 아이들에게 하는 행동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했다. 나는 책을 덮다가 장롱 모서리에서 틈새를 발견했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느닷없이 장롱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닫이문을 옆으로 당겼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또, 다시 힘을 주어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틈새는 점점 벌어져 이제 고양이 한 마리 정도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장롱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틈새로 하얗고 가냘픈 손이 쑥.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문이 열리지 않게 해 주세요. 아니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여기서 뭐 하니?” 어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이불에 모로 누워 훌쩍거리고 있었다. 가슴에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꼭 끌어안고. 나는 그날 수많은 방 중 하나의 문을 닫았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