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라노]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혀 절단 사건’ 정당방위 인정 안되나
정당방위 조건 모호해 인정 안될 때 많아
"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더라"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어린 시절 라노는 책을 굉장히 많이 보는 어린이였는데요.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읽어버렸죠. 지금은 어떤 책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정당방위’에 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요. 정당방위에 대한 예시로 ‘성폭행범 혀 절단 사건’이 나왔어요. 아주아주 오래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책의 내용이 기억나는 이유는 라노가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한 적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의 정당방위’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었죠.
‘성폭행범 혀 절단 사건’은 아직까지 법조계에서 정당방위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혀 절단 사건은 정당방위하면 아직까지 회자되는 유명한 사건으로 헌법학 서적에도 실려있으며, 1995년 대법원이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발간한 책에도 소개돼 있습니다. 성폭행범 혀 절단 사건이 대체 뭐길래 59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당방위냐 아니냐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까요?
▮59년 동안 잊을 수 없어
1964년 5월 6일, 당시 18세였던 최말자 씨의 친구들이 최 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사건이 시작됐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친구들이 제사를 지내고 남은 떡을 주기 위해 최 씨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친구들 뒤를 계속 쫓아왔고, 자꾸 할 말이 있다며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최 씨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길을 가르쳐달라”는 노 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죠.
친구들이 안전하게 집으로 갈 수 있도록 친구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편으로 길을 안내한 최 씨는 큰 길을 따라가라고 길을 알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 씨는 최 씨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고, 배 위에 올라타 키스를 시도했습니다. 최 씨는 노 씨를 밀치고, 도망치고, 다시 발에 걸려 넘어지기를 세 번 반복했죠. 세 번째에는 돌에 부딪혔는지 정신을 잠깐 잃었습니다. 그러다 깨어났는데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입 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어 뱉어내고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최 씨는 자신이 남자의 혀를 잘랐다는 사실도 몰랐죠.
당시 이 사건으로 최 씨를 수사하던 경찰은 ‘정당방위로 인정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에 넘겨지는 과정에서 노 씨는 ‘강간 미수’가 아닌 ‘특수주거침입’으로, 최 씨는 ‘중상해죄’로 검찰에 송치되며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재심을 신청한 지금, 최 씨는 재심을 열어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56년 만의 미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재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최 씨는 “법원이 재심을 받아주고 정당방위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환경이 바뀌고 사회의식이 성장했지만 법의 틀은 그대로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당방위
‘정당방위’는 위법한 행위에 의해 공격받는 급박한 상황에서 방어 행위를 통해 법익을 수호할 권리입니다. 형법 제21조 제1항은 정당방위를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하여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별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긴급상황에서는 국가가 개인을 보호할 수 없으므로 정당방위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당방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이유’를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상당성의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법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정당방위의 허용 범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정당방위 성립요건이 모호하죠. 정당방위는 사안마다 법원의 해석이 달라져 판결에서 인정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당방위를 적용하는 데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법원은 방어자의 행위가 공격 방어에 적절했다는 ‘상당성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당방위 주장을 기각해왔죠. ‘법이 생각하는 적절한 방어 행위’만을 정당방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방어행위가 공격행위보다 적극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하면 방어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형법에는 정당방위가 명시돼 있지만, 실제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기준을 적용시키면 쌍방폭행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법조인들은 정당방위를 주장하기보단 형량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최 씨의 사건은 ‘상당성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원히 정당방위를 인정받을 수 없을까요? 최 씨의 사건 이후 24년이 지난 1988년 비슷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습니다. 1988년 2월 새벽에 귀가 중이던 변월수 씨를 두 명의 남자가 골목길로 끌고 가 몸을 더듬고 강제로 키스를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변 씨는 엉겁결에 남자의 혀를 깨물었고, 혀의 일부가 절단됐죠. 혀가 잘린 남자의 가족이 변 씨를 고소하며 배상금을 요구했고, 구속된 변 씨는 성폭행 혐의로 그들을 고소했습니다. 1심은 변 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법사상 매우 유의미한 판결로 기록될 재판이었죠. 최 씨와 비슷한 사건의 좋은 판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재심이 인정된다면 정당방위로 인정될 확률이 충분히 있습니다.
부산대 오정진(법학과) 교수는 상당성 요건 자체가 ‘남성을 기준으로’ ‘전쟁의 논리’를 적용시켰기 때문에 정당방위 인정이 어려운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법이 ‘남성과 남성이 싸웠을 때 똑같이 갚아주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죠. 성별도 다르고, 신체조건도 다르고, 처해진 환경이 다른데 절대 공격행위와 방어행위가 똑같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해자의 한 번의 폭행과 피해자의 한 번의 방어가 같지 않을 수도 있는데 법원은 ‘한 번의 폭행은 한 번의 방어만 허용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 교수는 “사건이 일어난 상황과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송혜미 변호사는 “우리나라가 정당방위를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맞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법원의 판례에 따라 다음 판결의 방향이 정해지기 마련인데 아직까지 정당방위가 인정된 판례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죠. 송 변호사는 “법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며 “하지만 가정·데이트·성폭력 등에 한해서는 정당방위를 좀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최 씨는 대한민국의 법이 가해자에겐 약하게 적용되고 피해자에겐 인색하게 적용된다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최 씨는 아직까지 59년 전의 악몽을 꾼다고 말했죠. 최 씨는 “59년 전에는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잘못된 재판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재심도 받고 정당방위도 인정받을 줄 알았다”며 “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더라”고 말했습니다.
부산지방법원과 부산고등법원은 최 씨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청구인에 대한 공소와 재판은 반세기 전 오늘날과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밝히며 재심 청구를 기각했죠. 재심 청구는 대법원까지 들어갔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문턱을 넘은 셈입니다. 부산여성의전화 관계자는 “당시 사건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재심 청구 과정에서 힘들었다”며 “최말자 선생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대법원이 꼭 재심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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