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출산, 원정진료, 원정목욕…‘지방살이’ 원정인생 어디까지?

허윤희 2023. 6. 1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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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지방에 사는 임신부들은 사는 곳에 분만 병원이 없어 대도시로 나가 아기를 낳는 ‘원정 출산’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 프리즘] 허윤희 | 전국팀장

“하남에서 ‘원정 출산’을 해야 돼요.”

몇주 전 고향 경기 양평에 사는 한 임신부에게서 출산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12월 출산 예정인 그는 분만 예정 병원이 있는 경기 하남시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다닌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여러번 갈아타야 해서 자동차를 끌고 가는데 “(집에서 병원까지) 40분 정도 걸리지만 막히면 1시간 넘게 걸린다”고 한다. 왜 그리 고된 길을 가느냐면, 이유는 딱 하나다. 수도권이지만 사는 곳에 분만 병원이 없어서다. 그러니 그는 원하지 않아도 다른 지역에서 ‘비자발적 원정 출산’을 해야 한다. 국외로 나가 아기를 낳는 걸 ‘원정 출산’이라 일렀지만, 이제는 국내에서 분만 병원이 있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아기 낳는 걸 원정 출산이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경기 양평은 분만 취약지다. 분만 취약지는 가임인구 비율이 30% 이상이면서 분만실까지 60분 내로 접근을 할 수 없거나, 60분 안에 갈 수 있는 분만기관의 이용 비율이 30% 미만인 지역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국 분만 취약지는 충북 보은군, 전북 무주군 등 108곳이다. 이 지역에선 ‘인구 감소→출산율 저하→분만 산부인과 폐원→분만 환경 악화→젊은 인구 유입 감소’라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분만 의료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의료 인력 부족과 공공 의료 인프라 부족 문제 등으로 지역 의료체계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의료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원정 진료’는 예사다. 위급 상황이 생길 때는 응급실을 찾아 헤매야 한다. 강원도에선 ‘급성 심뇌혈관 질환은 태백산맥을 넘다가 죽는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한다고 한다.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영동과 영서로 나뉘는데, 영동지역인 양양군 등에 사는 응급 환자들은 영서에 있는 상급병원으로 이송 중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발간한 ‘2021 국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강원도민이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의료시설에 가려면 평균 21.36㎞를 이동해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서울은 응급의료시설까지 이동 거리가 평균 2.87㎞였다.

때론 그 원정을 끝내려고 지방을 떠나는 이들도 있다. 장현웅 보건의료노조 강원지역본부 사무국장이 들려준 한 젊은 부부의 경우가 그렇다. 어느 날 인제에 살던 부부의 아이가 놀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그 지역에서 치료할 수 없어 70㎞나 떨어진 춘천의 병원까지 갔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직업군인이었던 아이의 아버지는 전역하고 대도시로 이사했다. 아이가 위급한 상황일 때 병원을 찾아 헤맸던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장 사무국장의 말을 들으니 부모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됐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살면 뭐 하나, 아이가 아플 때 갈 병원이 가까이 없다는 건 부모에게는 큰 공포로 다가온다.

원정의 영역은 일상생활과 연결된 복지 분야로까지 넓어지고 있다. ‘원정 목욕’이 그중 하나다. 농촌 지역의 면 소재지에 공중목욕탕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 충북 옥천군, 보은군 등 지역에서는 가까운 곳에 목욕탕이 없어 주민들이 20㎞ 넘게 떨어진 대전이나 청주까지 ‘원정 목욕’을 간다고 한다.

이렇듯 ‘원정’은 지방살이에 따라붙는 단어가 되고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원정’(遠征)을 ‘먼 곳으로 싸우러 나감’으로 정의하고 있다. 전쟁 용어로 쓰였던 이 말이 이제는 지방에서 대도시를 찾아가는 것에 사용된다. 어쩌면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전쟁 같은 원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시간·경제적 부담을 넘어서서 고단하고 때론 삶과 죽음을 오갈 정도로 위험한 원정이 지금 지방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공공 의료와 복지 등 인프라가 무너지는 상황을 온몸으로 겪는 지방 사람들의 ‘원정’ 행렬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삶 전반에서 원정은 더욱 일상화되고 있다. 이런 삶, 지방에 살면 감내해야 하는가.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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