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 이순재의 독백 리어왕 그 자체였다
역대 최고령 주인공 역할로
200분간 인생 허무 쏟아내
빛나는 왕관을 내려놓은 왕은 그저 초라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의 시신을 끌어안은 아비는 늙은 것도 모자라 이제 미치광이에 불과할 뿐이다.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리어왕'은 4대 비극 중에서도 그 규모나 비극성이 가장 처절한 작품으로 꼽히곤 한다.
2년 전 공연과 마찬가지로 단독 캐스팅으로 리어왕 역을 맡은 배우 이순재(88)는 60년을 훌쩍 넘긴 연기 인생을 담아 그야말로 열연을 펼친다. 절대권력의 소유자로 등장한 리어왕이 시간이 지나자 얇은 옷 하나만 걸친 채 맨발로 무대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관객 또한 인생의 허무함을 곱씹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옷 색깔 못지않게 하얗게 바랜 느낌의 머리칼과 수염, 깊게 팬 주름, 특유의 탁성까지 모두 리어왕의 현신처럼 보이는 데 기여한다. 제작사는 공연이 끝난 뒤 이순재를 '역대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을 할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원작을 각색하거나 압축하지 않아 고어(古語) 문체가 살아 있으면서도 관객들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셰익스피어학회장으로서 번역을 담당한 이현우 순천향대 영미학과 교수는 "판소리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3, 4 음보 등을 활용해 말맛을 살렸다"고 밝혔다.
이순재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함께 시도해볼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기에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다"고 자신한 바 있다. 대사 한 번 틀리지 않는 열연 덕분에 200분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흘러간다.
조역들 또한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하게 수행해 낸다. 맏딸 고너릴 역의 권민중과 둘째 딸 리건을 맡은 서송희는 리어왕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으로 등장할 때부터 서로를 적대시하다 죽어갈 때까지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충신 켄트 백작 역의 박용수, 서자 에드먼드에게 배반당하고 두 눈이 뽑히는 글로스터 백작 역의 최종률 등도 관객의 집중력을 유지시킨다.
공연이 열리는 LG아트센터 무대 또한 황량하고 축축한 고대 영국 황야의 모습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 모습이다. 다만 음향은 각자 톤이 다른 배우들의 육성을 전달하는 데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도 있다. 공연은 오는 18일까지 단 16회만 진행된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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