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글로벌 큰손들의 '디리스킹'
'디리스킹(De-risking)'이 세계 경제의 핵심 키워드로 등장했다. 올해 3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언급한 이 단어는 히로시마 G7 회의에서 공식화됐다. 불과 두 달 만에 경제 안보를 설명하는 새 프레임으로 자리 잡았다.
디리스킹은 과도한 중국 경제 의존도를 낮추자는 것이다. 실행 방법은 핵심 산업의 동맹국 내 공급망 구축. 첫 번째 타깃은 반도체와 2차전지다.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한 세기를 유지해온 공급망 패러다임 붕괴 신호탄이다. 장난감 같은 아날로그 공급망만 유지되고, 디지털 신산업 공급망은 송두리째 바뀔 것이다.
반도체와 2차전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챗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I) 디지털 데이터는 그 자체로 경제 안보다. 디커플링(단절)에 가까운 디리스킹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이유다.
디리스킹이 화두로 등장해 기존 질서가 요동치고 있지만, 이보다 앞서 중국의 위험을 감지하고 리스크 관리에 들어간 분야가 있다. 바로 금융, 글로벌 머니다. 홍콩 시위에 대한 대응,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와의 밀착, 대만 침공 가능성 등 중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를 포착한 글로벌 머니들은 발 빠르게 '디리스킹'을 진행해왔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국부펀드와 연기금. 미국 연기금과 대학 기금들은 이미 작년부터 중국 투자 관리에 들어갔다. 텍사스 메릴랜드 등 각 주의 연기금은 투자 비중을 단번에 절반으로 줄였다. 펀드 매니저들의 판단이 아니라 공식적인 의결을 거쳐 비중을 낮춘다는 것은 중장기 전략 전환을 의미한다.
캐나다 유럽 싱가포르 큰손들도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움직였다.
올해 주요 국부펀드·연기금의 중국 주식 투자 비중이 한창때와 비교하면 90% 가까이 떨어졌다는 통계도 있다. '디리스킹'이 공식 석상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큰손들의 이탈은 더욱 빨라졌다. 캐나다 최대 연기금은 최근에 상하이 오피스를 폐쇄하고 중국 내 딜을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공급망 재편에 앞서 진행된 글로벌 큰손들의 디리스킹은 글로벌 투자망 재편이라 불러도 될 만큼 규모가 크고, 속도 역시 빠르다.
이 대목에서 드는 궁금증은 두 가지. 중국을 빠져나온 큰손들의 대체 행선지는 어디인가. 한국은 투자망 재편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적지 않은 투자 전략가들은 중국을 떠난 글로벌 자금이 신생 이머징 마켓이 아닌 유럽과 동아시아의 핵심 국가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해왔다.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분석이라고 본다. 올 들어 일본 독일 대만 등 공급망 핵심 국가에 글로벌 큰손이 몰리는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글로벌 자금의 디리스킹이 감지됐을 때부터 "한국에도 큰 기회가 몰려올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실제로 몇몇 글로벌 큰손들은 한국 오피스 확대를 추진해왔다. 홍콩 상하이가 동아시아 금융허브로서의 역할이 시들해지면 서울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라는 다소 과한 낙관론도 들렸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쏟는 범정부 차원의 노력과 비교하면 글로벌 투자망 재편에 대한 관심은 단발성에 그친다. 올해 외국인 자금이 증시에 유입되고 있지만, 코로나 시기에 빠져나갔던 자금의 재유입 수준에 불과하다.
자본시장 글로벌화는 한계가 있다는 고정관념에 갇혀서일까. G8 경제강국인 한국 증시는 여전히 신흥국 취급을 받고 있다. 그사이 과거 영광 재현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독일과 일본의 증시는 역대 최고치, 33년 만에 최고치를 뚫으며 글로벌 투자자들의 고정관념을 깨나가고 있다.
[황형규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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