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사이신과 '가짜 시위대', 경찰 대본의 의도

김한주 금속노조 언론국장 2023. 6. 1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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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동, 민중 따위 말은 '공개 대본'을 통해 '불법'과 더 가까워졌다
대통령 한마디에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모든 단어가 불온해졌다

[미디어오늘 김한주 금속노조 언론국장]

“공개 대본이란, 지배 엘리트들이 남에게 보이고 싶은 자기 초상화다. 전적으로 거짓과 허위의 실타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당파적이고 편파적인 서사다. 그것은 지배 엘리트들의 힘을 단호히 확인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면서도, 그들 내부의 부끄러운 일들은 감추거나 완곡히 표현하는 방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게끔 고안되어 있다.”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 제임스 C. 스콧

8일 언론에 공개된 경찰 캡사이신 분사 훈련에 깃발이 등장한다. 깃발엔 '노동 존중 사회 실현', '총파업 투쟁'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같이 살자', '생존권 보장'이 담긴 피켓도 눈에 띈다. 하나 같이 머리띠를 두른 이들은 각기 다른 깃발, 피켓을 들고 있는데 모두 가짜다. 집회에 나선 노동자와 민중을 '연기'하는 경찰이다. 함께 살아갈 권리를 외치며 파업에 나서거나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염원하는 이들 전체가 대본 속 진압의 대상이 됐다.

▲경찰이 2017년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중단했던 이른바 '불법 집회 해산 및 검거 훈련'을 6년 만에 재개했다. 8일 과천의 한 주차장에서 경찰이 경찰 집중훈련을 하는 모습을 연합뉴스 등 통신사가 사진기사로 보도했다. 사진엔 “캡사이신 이용한 불법집회 대응훈련”이란 제목을 달았다. ⓒ연합뉴스

이 경찰의 공개 대본은 대중 효과를 발휘한다. 사실 집회의 적법 여부는 대본에서 중요치 않다. 대중에게 '이들이 어떤 자들로 기억되는가'가 중요하다. 깃발과 피켓을 들고 '같이 살자', '노동 존중' 따위의 요구를 하는 자는 모두 국가 권력의 통제 대상, 고로 탄압을 당해야 하고, 거리, 광장에서 청소해야 할 자들이란 선전이 먹힌다. 언뜻 보기에 배우들의 말(깃발과 피켓)에 그릇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대역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대본의 서사는 깃발과 피켓 내용을 압도했고 이내 역전시켰다. '같이 살자'는 민주주의 요구가 테러리스트의 선동으로 전락하는 과정이다. 헌법적 기본권인 단결권, 파업 등 단체행동권,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지 말라는 국가 권력의 공개적 메시지에 지나지 않지만, 벌써 정부 우호 여론 확보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민중에게 경찰의 힘을 확인시키면서 국가 권력의 편파적 서사를 완벽히 구사하는 이 대본은 치밀한 계산 속에서 이뤄졌다.

'으레 시위대를 보아하니 이렇다더라.' 경찰은 수많은 시위 현장에서 반복해 목격한 것을 따라 했을 터다. 모방 속 노동자가 외치는 말의 개념과 의미는 '불법을 일삼는 시위대' 표본 전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껍데기만 남았다. '법치'와 '불법'의 서사 속 가려진 껍데기의 본질은 사람의 권리, 평등이었다. 2023년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과 평등을 요구하는 순간, 또 헌법 정신을 실현하려는 찰나 범죄자가 된다. 그리고 건설 노동자 양회동 열사가 공개 대본의 희생자가 됐다.

▲'양회동 열사 투쟁 노동시민사회종교문화단체 공동행동' 주최로 31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열린 추모 촛불문화제에서 건설노조 조합원 등 참석자들이 경찰의 천막 분향소를 강제 철거를 막아서고 있다. 사진=건설노조 제공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제임스 C. 스콧 저) 표지

대본 뜯어보기

캡사이신 분사 훈련이란 하나의 장면은 '집회에 엄정 대응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이 장면을 담은 프레임 속 작은 개체들은 서사에 따라 그 의미가 뒤집히기도 한다. 포스코 하청 노동 현실을 알리려 세운 '망루'를 '쇠파이프'로 둔갑시킨 보수 언론의 프레이밍처럼 말이다. 그래서 지배 권력의 서사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대본을 뜯어볼 필요가 있다.

캡사이신 훈련 대본에서 보이는 위력,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도구는 딱 두 가지다. 캡사이신 분사기와 경찰 방패다. 반면 저항하는 노동자를 연기하는 쪽은 각목도, 파이프도 들고 있지 않다. 단지 피켓과 깃발만 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있을 뿐이다. 경찰은 이를 두고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라고 취급하는 모양이다. 경찰도 알 것이다. 최근 십수 년간 조직된 집회 시위에서 죽창이나 파이프 따위가 등장한 바는 없다. 그런데 대본 속 노동자 '배우'들은 쪽수에서도 밀리는 형세에서 위력을 발휘할 여지도 없는데 그냥 캡사이신을 맞는다. 그냥 뭉치기만 하면 반격의 틈도 노리지 못하고 당한다. 위협이 없어도 '묻지마 불법, 강제 해산'의 대상이다.

아울러 노동자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요구를 따져보자. 노조를 향한 혐오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배우들이 내건 슬로건은 '노조 존중'도 아닌 겨우 '노동 존중'이다. 휘날리는 깃발에 적힌 '노동 존중 사회 실현'의 의미가 캡사이신 물줄기 앞에 무색하다. 애써 권위주의 정부와 싸우며 인권을 보편적 가치로 알렸기 때문에 대다수 언론에서 '근로(자)'란 단어가 사라지고 '노동'이란 단어가 정착됐다. 규모 있는 언론은 노동팀을 따로 꾸려 한국 사회 노동 현실의 문제를 적극 알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대본은 다시 '노동'이 불법·불온 세력과 등치하는 것으로 시간을 돌렸다.

▲경찰은 9일 서울 영등포구 건설노조 사무실 진입을 통제하고 압수수색했다. 사진=건설노조 제공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9일 한겨레에서 “민생을 절대 우선해야 한다고 침을 튀기던 국회의원들도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자'고 하면 주춤한다. 노동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멀쩡하던 사람들 시야에는 일종의 편광 필터가 끼워지고 입에는 보이지 않는 재갈이 물린다”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가 노동자와 임노동을 타자화하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거대한 사회심리적 카르텔이 지배하는 사회, 간단히 말하면 자본가 계급의 헤게모니가 철저히 관철돼 온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캡사이신 훈련의 대본은 위에서 언급한 임노동을 타자화하는 사회심리적 카르텔을 더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캡사이신 훈련 속 등장한 '생존권'이란 단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마저 타자화되는 맥락에서 박탈 당할 기세다. 노동, 민중, 생존, 권리 따위의 말이 소수를 향한 것이 아닌 사회 구성원 다수에 해당하는 것인데도 이 말과 개념들은 공개 대본을 통해 '불법'과 더 가까워졌다. 그 결과 일상적 통제 대상으로 굳어졌다. 어느 누가 '노동 존중'이 진압 대상이라고 했는가. '같이 살자'는 것이 캡사이신을 뒤집어쓰기에 마땅한 구호라 했는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불법은 권력을 가진 자가 색칠하기 마련인가. 이 나라 대통령 한마디에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모든 단어가 불온해졌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노동개악·노조파괴 분쇄! 윤석열 정권 퇴진! 금속노조 총파업대회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 손피켓을 들고 있는 가운데 경찰이 캡사이신을 메고 있다. ⓒ민중의소리

빼앗긴 말 되찾기

권력의 전시와 의례. 이는 지배와 복종의 체현을 꾀하면서 권력의 안정을 누린다. 그러나 저항 없는 지배는 없다는 말처럼, 피지배자들의 은닉 대본도 풍성해진다. 일터와 삶터에 옹기종기 모인 자들이 권력을 꼬집고, 불만을 제기하고, 때로는 온라인 상에서 비난과 풍자에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경찰 캡사이신 훈련에 등장한 '가짜 시위대'로 진짜 그 피켓을 들었던 자에 언짢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일 테다. 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지배의 기술을 파악하고 개념을 탈환하는 것. 그로써 다수 군중이 은닉 대본을 거리에 펼쳐 “정치적 전율”과 함께 비굴감을 던져버리는 일이다. 그게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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