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아도 베낍니다” 대기업에 기술 빼앗긴 중소기업의 탄식 [주말엔]

배지현 2023. 6. 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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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우리도 고생한 결실을 맺게 됐다!"
정형찬 대표가 대기업 한화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직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던 말입니다. 정 대표가 운영하는 중소기업은 7년간 40억 원 넘게 기술 개발에 투자해,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태양광 스크린 프린터' 기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중소기업은 홀로 큰 사업을 따내기 어려운지라, 정 대표에게 대기업 납품은 둘도 없는 기회였습니다. 원하청 관계를 맺은 후 한화는 납품과 관련해 통합 매뉴얼을 작성한다는 이유를 대고 정 대표 측에 기술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처음엔 장비 도면과 세부적인 부품 구성 리스트 등을 보내지 않았지만, 원청에선 재차 세부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하도급 계약이 끝나갈 때 즈음, 정 대표는 '한화에서 자체 태양광 스크린 프린터를 개발한다'는 업계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지인에게 받은 사진 속 한화의 자체개발 장비가 정 대표의 장비와 너무나도 유사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 대표는 한화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고, 3년 간의 행정조사 끝에 공정위는 한화가 정 대표 회사의 기술자료를 유용한 행위를 인정했습니다. 공정위는 검찰 고발과 함께 한화에 시정명령과 과태료를 부과했습니다.

이 공정위 처분은 실제 집행까진 이뤄지지 않았는데, 한화가 행정소송을 제기해 고등법원과 대법원으로부터 처분 취소가 타당하다는 판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급심 법원은 공정위 처분 취소 판결을 내리면서, 기술탈취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고 공정위 처분 시효 3년이 지났다는 점을 판결 이유로 들었습니다.

■ 공정위가 기술탈취 인정 했는데…민사는 "증거 불충분" 패소?

기술침해 사건 이후, 정 대표 회사의 '태양광 스크린 프린터' 매출액은 2년만에 52억 원에서 4700만 원으로 급감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가 한화에 부과한 과태료는 단 한 푼도 피해 기업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피해 기업이 기술탈취로 인한 손해를 보전받기 위해선, 민사 손해배상 소송에서 자신의 피해를 다시금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화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정 대표는 패소했습니다. 피해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사건 1심 판결문에는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표현만 총 7번이 등장합니다. 공정위가 3년씩이나 조사해 기술침해가 인정됐는데도, 왜 법원은 "증거가 없다"고 본 것일까요.

법원에서는 공정위에 '문서송부촉탁'을 통해 기술침해 결정 근거가 된 자료를 요청했지만, 공정위가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정거래법 제110조(기록의 송부 등)
법원은 제109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의 소가 제기되었을 때 필요한 경우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하여 해당 사건의 기록(사건관계인, 참고인 또는 감정인에 대한 심문조서, 속기록 및 그 밖에 재판상 증거가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의 송부를 요구할 수 있다.

하도급법에서 준용하는 공정거래법 제110조에 따라, 법원은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제기되면 공정위에 재판상 증거가 되는 모든 기록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요청'에만 그치기 때문에, 공정위는 "문서송부촉탁에 반드시 응해야 할 법적 의무가 없다"며 사실상 법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공정위가 행정조사 중 확보한 한화의 내부 이메일에는 '한화의 자체 개발 스크린 프린터의 기본 구조는 정 씨 회사 장비와 동일하게 구성될 것'이라는 기술침해 의도가 드러난 내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핵심 증거들은 공개된 의결서를 통해 내용만 간접확인이 가능할 뿐, 실물로 제출되지 못해 증거능력이 떨어진 겁니다.

공정거래위원회 의결서 내용 중 일부


공정위는 법원의 문서송부촉탁을 사실상 거절한 것에 대해 "소극적으로 응한 게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비밀엄수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손해배상청구소송에 피고 및 제3자의 영업비밀과 관련된 문서 등에 대해선 제출할 수 없다는 겁니다.

■ 2심에선 판결 뒤집었지만…"나홀로 피해 증명 너무 힘겨워"


2심에서는 결과가 뒤집혔습니다. 2심 재판부는 한화의 기술탈취 행위를 인정하고, 피해 중소기업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분쟁 사건으로는 최초로 징벌적 손해배상이 2배로 인정돼 총 10억을 배상하라고 결정했습니다.

1심과 달라진 건 딱 하나, 조금이나마 증거를 확보했단 거였습니다. 법원을 통해 한화에 공정위가 인용한 증거 제출을 신청하고, 공정위에 끊임 없이 요청해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으로 '공정위 기술심의위원 의견' 등 일부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이 역시도 피해기업은 증거 자료를 극히 일부만 받아낸 상태에서 어렵게 이뤄낸 결과였습니다.

기술탈취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들은 입을 모아 "피해를 증명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한화를 상대로 피해기업 변호를 맡은 정영선 변호사는 지난달 세미나에서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정영선/피해기업 변호사]
"기술 탈취는 보안 통제가 되는 기업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피해기업이 무슨 도청 감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밧줄타고 톰 크루즈처럼 내려가서 사진을 다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리인이나 피해 당사자가 내용을 확보하거나 증거로 만들 방법은 사실은 없습니다. 불가능한 겁니다. 당사자가 이렇게 못하는 일이라면, 그걸 할 수 있는 부분은 결국은 국가 공권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권력으로 행정조사가 가능한 공정위 등 기관에서 자료 제출을 통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결국 중소기업이 기술탈취 피해를 배상받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집니다.

그러나 행정조사 기관도 자료 제출이 쉽지 않습니다. 공정위의 경우 법원의 문서제출 요구가 왔을 때, 개별 사건의 담당자가 제출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내부에 세부적인 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채, 비밀유지 의무와 충돌하는 결정을 공무원 개인이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의 문서제출 요구에 공정위는 소극적으로 응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 일본 공정위는 내규 마련…민사 소송에 자료 제공 세부 기준도

일본에서도 행정조사 자료 제출과 관련해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민사소송법에 따라 법원이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경우, 공무원의 비밀유지 의무와 충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원의 자료제출 요구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일본 공정위 사무총장 통달


이 내규의 첫 단락에는 "독점금지법 제25조에 기초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제도의 유효한 활용을 도모하기 위해 (…) 판사 또는 소송 당사자가 요구할 경우 자료 제공 등을 다음과 같이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공정위의 명령 확정 이후 손해배상 소송이 민사에서 제기되기 전과 후에 어떤 자료를 제출할 수 있는지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손배소 소송 이후 법원에 제출할 수 있는 문서의 예시도 나열됩니다.

(가) 위반행위의 존재에 관련된 자료의 구체적인 예
= 명령에서 사실확인의 기초로 삼은 자료
(나) 위반행위와 손해 간의 관련성 또는 인과관계 및 손해액과 관련된 자료의 구체적인 예
a. 위반행위의 대상 상품 또는 업무의 거래·유통 관행 등에 관한 자료
b. 위반행위의 경위, 실시상황, 실질적 확보 수단 등에 관한 자료
c. 기타 위반행위와 손해 간의 관련성 또는 인과관계 및 손해액을 입증하기 위해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자료

물론, 자료를 제출할 때 그 내용이 사업자의 비밀에 해당하는지를 고려해야 하는 건 우리나라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공정위는 사업자의 비밀이 ▲비공개된 사실인지 ▲사업자가 비밀 유지를 희망하는지 ▲객관적으로 볼 때 비밀로 유지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를 다시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기준이 마련되어 있으면 개별 공무원이 자료제출 여부를 결정할 때, 충돌하는 의무 속에서도 자료 제출 가능 여부를 더 꼼꼼히 따져볼 수 있습니다. 기준이 있으니 자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도 완화됩니다.

■ 승소는 했지만…배상액은 개발비용의 '4분의 1' 수준

2심 재판부가 기술침해 피해액으로 산정한 금액은 '5억 원'이었습니다.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 2배가 인정돼 한화가 총 10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피해액 5억 원이 산정된 정확한 산식은 없었습니다. '태양광 스크린 프린터' 기술 가치의 세부적 평가도 이뤄지지 않은 채로, 법원이 제반 사정을 고려해 판단했습니다.

피해기업이 기술 연구 및 개발에 사용한 비용 자료


정 대표가 7년간 기술 개발에 투자한 비용은 총 40억 원이 넘고, 한화의 기술침해 이후엔 '태양광 스크린 프린터' 매출액은 2년 만에 52억 원에서 4700만 원으로 확 줄었습니다. 심지어 하도급 관계였을 당시 한화에 납품하던 장비 한 대의 값인 8억 2500만 원보다도 기술침해 손해액이 낮게 책정됐습니다.

일부 침해가 인정되었는데도 왜 손해액은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됐을까. 중소기업의 기술침해 소송을 돕는 재단법인 경청의 박희경 변호사는 "법원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라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박희경/재단법인 경청 변호사]
"기술적으로 고난이도 사건이기 때문에 침해가 인정되는 부분이 과연 손해로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기여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기술적인 판단이 굉장히 어려워요.
우리 법령에는 손해배상 산정이 힘들 때 변론전체 취지를 종합해서 법원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손해배상을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이게 구체적인 계산 근거가 있다기 보다는, 법원이 합리적인 재량 안에서 내린 배상액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발비용에도 못 미치는 손해배상 금액에 정 대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젠 기술 개발할 의지를 잃었다"며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명무실한 처벌 규정 때문에 기술 탈취가 끊이지 않는다는 지적에 정부는 최근 '중소기업 기술보호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액 상한을 기존 3배에서 5배로 확대하고, 객관적인 손해액 산정 기준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기술 침해 예방 단계, 분쟁 단계, 침해 후 회복단계까지 촘촘하게 중소기업 기술보호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피해 중소기업들은 정부의 대책을 반긴다면서도, 일부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대책엔 기술침해 증거 확보를 위한 행정기관의 자료 제출과 관련해 진전된 내용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징벌적 손해배상 상한을 5배까지 늘려도 '최소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실제 법원이 판단하는 양형기준이 함께 변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도 피해기업은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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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현 기자 (veter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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