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도래인들은 ‘아욱 로드’ 따라 교토에 간 걸까?

한겨레 2023. 6. 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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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서울&]][서울&] 교토, 걸으며 생각하며
교토 3대 축제 ‘아오이마쓰리’에 담긴
‘고대 한국인의 일본 열도 도래사’
아오이마쓰리 퍼레이드. 여제사장(사이오다이) 등 참가자 전원이 푸른 아욱 잎으로 장식하고 있다.

지난 5월16일 교토에서는 ‘교토 3대 마쓰리’의 하나인 ‘아오이마쓰리’(葵祭) 축제가 코로나19로 중단된 지 4년 만에 다시 열렸다(본래는 5월15일 열리지만 비로 순연됐다). 참가자들이 중세 의상을 하고 거리를 행진하는 퍼레이드가 축제의 꽃이다. 올해의 거리행진은 오랜만에 다시 보는 기대감 때문인지 공식 참관석은 매진됐고 행렬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까치발을 하고 사진을 찍는 시민과 관광객(경찰 추산 약 4만 명)으로 가득했다. 특히 일본 왕실의 아키히토(90) 상왕 부부가 도쿄에서 교토까지 와서 직접 참관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4년 만에 다시 열린 교토 대표 봄축제왕이 신사에 보내는 공물 행렬을 재현한반도 도래인 가모족 씨신제가 기원90살 아키히토 상왕 부부 이례적 ‘직관’퍼레이드 참가자 모두 ‘푸른 잎’ 장식“만남 상징”인 아오이는 우리말 ‘아욱’한국·중국·일본 모두 아욱 중요시해대륙-반도-열도 잇는 “아욱길” 상상

아오이마쓰리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인 시모가모(下鴨)와 가미가모(上賀茂) 두 신사(연재 2회 참조)의 예제(시제)로, 7월의 기온마쓰리(祇園祭), 10월의 지다이마쓰리(時代祭)와 함께 교토 3대 마쓰리의 하나로 꼽힌다. 1400여년 전 왕이 나라의 안녕과 오곡풍작을 기원하며 가모신사 제사에 공물을 보낸 데서 기원한다.

퍼레이드는 그 칙사행렬을 재현한 것이다. 중세 귀족과 제관으로 분장한 약 500명의 인원과 말 36마리, 소 4마리, 여러 대의 가마와수레, 꽃우산 등이 800여m의 긴 행렬을 이루며 교토고쇼(옛왕궁)를 출발해 가모가와강변을 따라 제사 장소인 두 가모신사까지 약 5㎞를 행진한다. 행렬 맨 뒤에는 화동과 여관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탄 ‘사이오다이’(齊王代, 중세 왕실 공주 가운데 뽑혀 신사에 보내져 제사를 주관하는 여제관 ‘사이오’의 대역)가 행진의 대미를 장식한다. 1956년 시작된 사이오다이는 교토시민 자원자 중에 선발되는데, 올해는 ‘영국 유학파 벤처캐피털회사직원’이 뽑혔다.

가모족 신사인 가미가모신사 본전의 신사 상징문장 ‘후타바아오이’(이파리가 두 장인 아욱). 같은 모양의 문장이 신라계 하타씨 신사(마쓰오타이샤)에도 있다.

아오이마쓰리의 공식명칭은 가모마쓰리(賀茂祭)이다. 고대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도래계 호족 가모씨가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낸 씨신제였다. 그러다가 6세기 한 왕이 가모신사에 공물을 보내면서 왕실과 관계를 맺었고, 교토로 천도(794)한 뒤인 9세기 무렵부터 왕실제례로서 격식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가모마쓰리가 아오이마쓰리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은 17세기 무렵부터.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인물, 동물, 가마 등이 모두 ‘푸른 잎사귀’를 몸에 장식한 데서 이름이 나왔다. 이 푸른 잎사귀 ‘아오이’는 접시꽃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한국·중국·일본인 모두 즐겨 먹는 건강채소 ‘아욱’이다. 필자 같은 ‘한국 사람’에게는 진귀한 퍼레이드 구경보다는 이 두 나라 말의 유사성이 더 깊은 잔상을 남겼다. 어쩌면 이날 고령을 무릅쓰고 아오이마쓰리를 ‘직관’한 아키히토 상왕도 비슷한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이 푸른 잎사귀에는 선사와 역사 시대를 넘나드는 스토리가 내재해 있다.

가모신사를 세운 가모족은 가모가와강 상류에 먼저 정착해 있던 이즈모(出雲)족과 결합해 가모가와강 일대를 지배한 한반도에서 넘어온 씨족이다. 시모가모신사에는 이들이 “조상신이 강림한 신산(神山)을 향해” 제를 올리던 제사 터가 발굴돼 있다.

시모가모신사 옆에서 발굴된 고대 가모족 제사터 지금도 여기에 예를 갖추는 교토 사람들이 있다.

푸른 아욱 잎사귀는 가모족 신화에 등장한다. 신화에 따르면, 신을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은 ‘푸른 아오이 잎으로 몸을 장식하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신이 강림한 신산에는 푸른 아오이가 무성했다고 하고,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는 푸른 아오이 잎이 ‘만남’의 매개가 되어주는 이야기이다. 이 신화에 근거해 아오이의 어원을 일본어의 ‘만나다’라는 뜻인 ‘아우’(合う)와 신령 또는 신의 힘을 뜻하는 ‘히’(力)의 합성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손들의 신화적 해석일 뿐 한국어와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오이’는 토템화된 ‘아욱’ 그 자체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아욱과 아오이의 언어적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아오이는 중세 일본어로는 ‘아후히’이고, 15세기 한국어로는 ‘아혹’이다. 아오이와 아욱이 원래 같은 말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아욱/아오이의 현대 중국어는 쿠이(葵. kuí)이다. 고대 음은 아욱/아오이와 더욱 비슷했을 것이다. 한반도 방언으로 살펴보면, 아우기(평안도)-아북(함경도)-아웁, 아국, 아궁, 아웅, 아복, 아부지(경상도, 전라도) 등의 형태로 ‘남하’하고 있다. 이 남하 경로를 타고 일본 열도로 들어가서 아후히-아오이로 정착돼갔을 것이다.

시모가모신사에서 제사음식을 만들던 옛 부엌(일본 중요문화재).

아오이는 아마도 가모족의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깊은 인상을 남긴 식물이었기에 고대 신전의 제사음식 형태로 씨족의 집단기억 속에 각인됐을 것이다(시모가모신사의 부엌 ‘대취전’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아욱은 고대로부터 중국에서도 채소의 왕이라 할 만큼 즐겨 먹었고, 한국에서도 ‘가을 아욱국은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등의 속담이 전래할 만큼 유익하게 여긴 채소였다.

이처럼 동북아 3국 모두에 친숙한 ‘葵’(kuí), ‘아욱’, ‘あおい’는 고대에는 같은 발음과 뜻을 가진 동북아 사람들의 공통어였다고 생각한다. 이 ‘푸른 잎사귀’에는 아득한 옛날 고조선이나 부여·고구려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를 거쳐 ‘신산’(일본 열도 규슈 지방)에 도착한 뒤 해안선을 따라 혼슈의 교토 지방으로 이동해온 한반도 도래인의 ‘선사’(先史)가 새겨져 있다. 이 스토리는 실크로드와 같은 문명 루트가 생기기 전에 농사짓기 좋고 안전한 땅을 찾아 이동했던 고대인들의 ‘아욱 로드’를 상상하게 한다.

‘아욱길’을 따라 열도에 다다른 도래인들은 어떻게 ‘일본’이 돼갔을까. 아오이마쓰리 퍼레이드의 종착지인 가모신사의 문장(紋章·상징문양)은 ‘후타바아오이’(雙葉葵). 두 장의 잎으로 묘사된 아오이 문양이다. 어쩌면 이 후타바아오이에 그 실상이 암시돼 있는지 모른다. 이 문장은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인 시모가모와 가미가모 두 신사의 친족 관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오이마쓰리 당일 시모가모신사 인근 민가 대문 앞에 놓인 아욱 화분. 민중 속에 뿌리내린 아오이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관점도 있다. 교토의 또 다른 도래인 호족이었던 신라계 하타씨 신사에도 이와 똑같은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가모씨와 하타씨는 혼인 등으로 동맹을 맺고 고대 교토 일대를 양분해 다스린 호족이었다. 서기 794년 간무 덴노가 교토 천도를 단행했을 때 배후에서 이를 지원한 세력이 이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 부족은 왕이 교토로 옮겨온 뒤에는 왕실 수호 신사를 자임했는데, 이런 내력으로 후타바아오이는 가모족의 내부 결합에서 나아가, 가모씨와 하타씨 두 부족 간의 단단한 동맹, 즉 ‘결합력’(아오이)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개의 가모신사 자체가 애초 가모족과 이즈모족 동맹의 결실이기도 했다. 훗날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쓰 가문의 문장은 3장짜리 아오이인데, 후타바 아오이가 그 원형이라고 한다. 도쿠가와 가문은 동맹과 확장이라는 후타바아오이의 ‘본질’을 일찍부터 통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키히토 상왕은 왜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아오이마쓰리를 직관할 생각을 했을까. 그는 덴노 시절 “교토 천도를 단행한 간무 덴노의 어머니가 백제계라는 사실에서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했던 사람이다. 이 구순의 상왕은 비로 하루 순연된 아오이마쓰리를 참관한 뒤 나라로 이동해 고대 한-일 교류의 역사가 짙게 밴 호류지(법륭사)와 주구지(중궁사. 고대 일본의 기틀을 닦은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를 모신 절. 우리나라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똑 닮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다)에도 들렀다고 한다. 그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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