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때 호남이 고립된 이유 [독서일기]

장정일 2023. 6. 11.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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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정치사회학〉
곽송연 지음
오월의봄 펴냄
ⓒ이지영 그림

피해자(광주 시민) 서사를 중심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연구한 결과물은 많이 있지만, 가해자인 군인(특전사 부대원)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방관자(광주 바깥의 대중)의 사정을 연구한 사례는 별로 없다. 곽송연의 〈오월의 정치사회학〉(오월의봄, 2023)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다. 이 책은 “‘특별하게 잔인했던’ 가해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해답”이자 “왜 다른 어떤 도시도 연대와 지지를 보여주지 않았나에 대한 정치사회적 설명”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반대자를 ‘빨갱이’로 몰면서 빨갱이 학살을 용인하고 부추겼다. 해방 정국에서 정치에 동원된 한국군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에서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베트남전쟁에서도 같은 경험을 쌓았다. “따라서 이러한 학살에 대한 학습효과는 5·18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적 학살 사건의 중요한 유인이 됐으며, 당시 가해자들의 행동 양식을 규명하는 데 주목할 만한 배경이 된다.” 모든 군대가 그렇지만 광주 진압의 주력군이었던 특전사는 어느 부대보다 더 동료 집단의 압력과 집단의 순응성이 높다.

지역주의 갈등으로 5·18을 설명하는 담론이 꽤 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도 거기에 속하는데, 한국군이 여러 차례 학습한 민간인 학살과 진압의 주력이었던 특전사의 성격상 광주에서 보인 행태가 결코 일회적이거나 특수한 것은 아니었다. 지은이는, 5·18은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학살이 동기가 된 일반적 형태의 ‘정치적 학살’이며, 5·18을 지역주의 갈등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신군부의 공식 담론이었다고 말한다. 5·18 진압을 국가의 안정·안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미화하는 신군부는 5·18을 “사익에 뿌리를 둔 지역주의”적 망동이었다고 선전한다(‘사익’의 배후에는 김대중이 있다). 신군부의 공식 담론은 반공주의에 결합하여 호남을 더욱 고립시켰다. 그러나 지역주의는 5·18 때문에 생겨났지, 그 전에는 지역주의가 없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서 대중의 무관심과 방조가 두드러진다. 학살에 대한 적극적 반대 또는 소극적 의사표시마저도 높은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5·18의 경우 반공주의에 재갈이 물리고 안정을 바랐던 대중보다 더 비난받아야 할 것은 언론과 지식인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나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의 침묵은 그들이 이미 점유한 도덕적·윤리적 권위로 인해 일반인들의 방관보다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의 학살에 대한 침묵은 그 자체로 폭력을 용인하는 메시지를 가해자들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박정희에게서 전두환으로 넘어간 그것

5·18 이후, 운동권에서는 미국이 신군부의 유혈 진압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급속히 번졌고 그것이 반미주의의 새로운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광주에 대한 정보가 주한 미국 대사와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넘어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설사 유혈 진압 사태를 알았다 하더라도, 미국은 한국의 안보가 아닌 ‘인권’이라는 명목으로는 절대로 광주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극적 승인과는 거리를 둔 묵시적인 동의에 가까웠다.

1979년 3월5일 63세의 대통령 박정희가 49세의 육군 소장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때 전두환은 제1사단장을 맡은 지 막 1년3개월이 된 소장이었다. 본래 군단장급 직위인 보안사령관은 중장 이상의 장성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전두환의 마지막 33년-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사이드웨이, 2023)를 쓴 정아은은 이 파격적인 일화로 전두환 평전을 시작한다. “임명장을 넘겨준 순간, 156㎝의 왜소한 체구의 사내에게서 170㎝의 탄탄한 체구의 사내에게로 뭔가가 넘어갔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치명적인, 커다랗고 단단한 덩어리가. 사후에 벌어진 결과를 놓고 보면 박정희가 제 죽음을 예상하고 영혼의 일부를 건네준 듯한 느낌이 든다.”

18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던 권력자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보안사령관 자리가 누구에게나 행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두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날 새벽, 그는 동기생으로부터 쿠데타 소식을 전해 듣고 육군본부로 박정희 장군을 찾아갔다. 쿠데타 성공 여부를 두고 초조해하던 박정희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육사 동창회에서 혁명 지지 의견을 내겠다”라고 제안하는 새파란 육군 소위를 반기며 ‘혁명군’ 완장을 채워주었다. 이 당돌한 행동으로 전두환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박정희) 비서관이 되었고, 덤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비상한 정치군인이었던 전두환은 출세욕과 승부욕으로 자신의 운을 만들어나갔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통점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무데뽀 정신’이었고, 박정희에서 전두환에게 넘어간 ‘영혼’도 다른 게 아니라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이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1954), 박정희의 10월 유신(1972), 전두환의 12·12(1979)는 모두 무모함과 독선의 극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신생 독립국 중 유일하게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국이면서, 독재를 행사하거나 부패한 지도자(이승만·전두환·박근혜)를 세 번이나 쫓아내고 그 자리에 국민의 손으로 뽑은 지도자를 세운 나라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권력자 위에, 그들보다 더 센 국민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95년 12월, 전두환은 내란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교도소에 갔다. 전두환이 죽을 자리는 거기였다. 그런데 제15대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요청으로 퇴임 직전의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전두환을 사면했다. 그러자 대통령감이라는 정치인들이 전두환을 찾아가서 큰절을 올리는 해괴한 일이 생겨났고, 5·18 민주화운동을 부인하는 세력도 곰팡이처럼 번졌다. 그가 재임 기간에 재벌들로부터 걷은 1조원가량의 기부금은 현재 53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정아은은 이렇게 말한다. “김대중이 전두환 사면에 힘을 실어준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시스템과 법치가 아닌 지도자 개인의 심기를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예시였다.” 대통령 사면권은 왕정 시대의 유제다. 법원 판결을 행정부의 수장이 취소하는 것은 삼권분립 정신에 위배된다. 내란죄로 무기형을 선고받은 전두환은 2년 남짓 만에 출소하고, 내란죄도 내란음모죄도 아닌 내란선동죄로 9년8개월 형을 받은 이석기는 8년3개월을 살고, 사면도 아닌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사면과 가석방의 차이를 검색해보시라.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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