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말과 행동을 낳고, 인생의 품위를 결정한다
[[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북산(北山) 포함하여 목사 친구들이 무슨 마술(魔術)을 부린다. 그러다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나둘 제 마술을 버린다. 버린다기보다 흡수시킨다고 하는 게 맞겠다. 버리는 대로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더 큰 마술에 스며들어 그것을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마술이란 말 자체가 속임수란 뜻이니 말하자면 작은 속임수들이 큰 속임수를 이룬다는 얘기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한다.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어디에도 없다. 저기 있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있어 보이는 거다. 여기 없는 것도 실제로 없는 게 아니라 없어 보이는 거다. 어제 ‘불확정성 원리’라는 말을 만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를 읽었더니 이런 꿈이 찾아온 건가? 깊이 생각할 것 없다. 보이는 대로 보자.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이것이 실체라고, 이건 반드시 이런 거라고, 확신하여 우기지는 말자. 마술이 사람을 속이는 짓이지만 사기(詐欺)로 징벌당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속임수임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꿈이다. 젊은 시절의 아내와 강변 버드나무 그늘에서 벌거숭이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데 지나가던 젊은이가, 어? 목사님 아니세요? 한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벌건 대낮에 그것도 야외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을 하고 있느냐는 표정이다. 웃으며 답한다, 보다시피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있네. 이게 뭐 어째서? 젊은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돌 위에 걸터앉는다. 정색하고 젊은이에게 묻는다. 흠, 자네가 나와 토론을 해보자는 건가? 좋아, 어디 말해보시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게 어째서 해괴한 짓인가? 그게 아니라 섹스는 은밀한 데서 해야지요.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면 짐승과 다를 게 뭡니까? 젊은이, 자네가 짐승하고 사람을 비교하니 하는 말인데 사람이 짐승과 정말로 다른 점이 뭔지 아는가? 짐승은 오로지 생식을 위해서만 교미하고 사람은 여자의 달거리 때만 아니면 언제든지 자네 말로 섹스를 할 수 있네. 왜 그럴까? 짐승에게는 생식기가 문자 그대로 생식을 위한 기관일 뿐이지만 사람에게는 생식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위한 기관이기도 하거든. 생식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래서 정해진 때를 어길 수 없지만 사랑은 아무 때나 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라고 남모르게 비밀스럽게 한단 말인가? 젊은이가 입꼬리를 비틀면서 그래도 이런 형태의 섹스행위는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거라고 말없이 말한다. 허허, 웃으며 아직 젊은 나이에 여든 살 늙은이보다 생각이 고루하면 어쩌자는 건가? 큰소리로 말하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대학생 시절 성철 스님 책에서 보살의 수행이 깊어지면 꿈과 현실이 같다는 문장을 읽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는데 한 이십년 꿈을 꾸며 살다 보니 비로소 조금 알겠다. 현실도 꿈도 다름 아닌 본인 의식의 발현일 터인즉 꿈에서는 잠재의식이 여과(濾過)도 꾸밈도 없이 나타나고 현실에서는 깨어있는 현재 의식 때문에 여과되거나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보살의 수행이 깊어지면서 잠재의식이 현재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순화(純化)된다는 얘기겠다. 그나저나 꿈의 내용이 현재 의식으로 간섭할 수 없는 무엇이긴 하지만 별 희한한 꿈 다 꾼다. 우습고 재미있다.
#북산(北山)과 정생(正生)이 투명한 눈길로 마주 보며 앉아있다. 정생이 더듬거려 말한다, 자기한테 5천원은 있는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빈 주머니라고, 미안하다고, 이 불경기에 조금이라도 보태야 하는데 정말 미안하게 됐다고.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돌연 멀리 낙동강 모래밭에서 아이들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동화작가 권정생’을 기리는 노래다. 어? 둘 다 죽은 사람이잖아? 놀라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정생 죽고 뒷갈망을 해준 사람이 북산이다. 이제 북산도 갔으니 방금 강가에 앉아있던 셋 가운데 하나 남았다. 셋이 장터에서 안동국수 말아 먹던 생각이 난다. 국수 값은 언제나 북산 아니면 이오 몫이었지. 왜냐하면 권 아무는 글 팔아 번 돈이 몇 억이나 되지만 이제나저제나 하늘 아래 최고 가난뱅이 인생이었으니까. 주머니에 5천원도 없는 빈털터리였으니까. 그렇다, 가난이라는 게 있다면 돈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는 거다. 사람도 아니다, 그의 삶에 있는 거다. 그러므로 권정생은 세상없어도 가난한 글쟁이다. 그를 형이라 부르며 인생 여정을 나란히 하던 시절이 새삼 고맙고 대견스럽다. 아, 보고 싶구나, 정생 그리고 북산.
#어수선한 꿈 막판에 뜬금없이 웬 너털웃음이다. 허허허,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허공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어디로 온단 말이냐? 언젠가, 허공 같은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니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말 같기도 하고 아무리 원해도 그럴 수 없다는 말 같기도 하고, 하지만 기분이 안 좋지는 않다. 오랜만에 천지인 수업. 그냥 생각하지 말고 생각 좀 하면서 생각해라. 네 생각이 말과 행동을 낳고 그것들이 네 인생의 품위를 결정한다.
#길에서 ‘죽변교회’라는 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간다. 텅 빈 방에 인기척이 없다. 문득, 아무도 부르지 않은 곳에 왜 앉아있지? 생각이 든다. 누가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 싶어 급히 밖으로 나오는데 머리가 서늘하다. 음, 모자를 두고 왔군, 다시 들어가다가, 아니야, 이건 꿈이니까 모자를 두고 온 게 아니야, 라는 생각과 더불어 꿈에서 나온다. 흠, 사람들이 지금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한바탕 꿈인 것을 알면 어찌 될까? 모든 게 마냥 궁금하고 재미있고 심각하지 않고 그렇겠지. 왜냐하면 무엇을 잃어도 잃은 게 아니고 어디가 아파도 아픈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니까. 인도의 요가난다는 현실을 하느님의 꿈이라 하고 우리 조상들은 인생 일장춘몽이라 하였지. 어쨌거나 꿈에서라도 초대받지 않은 곳에 들어갔다가 서둘러 나온 건 잘했지 싶다. 산불여무(山不如無)라, 산도 없느니만 못하다 했거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늘 악(惡)을 원하면서 늘 선(善)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말이 있단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말한다. “옳은 주장의 반대는 그른 주장이다. 하지만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다른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선과 악은, 이쪽과 저쪽처럼, 서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한 지구의 동(東)과 서(西)요, 남(南)과 북(北)이다. 이른바 세상의 “나쁜 놈”을 이 관점으로 보면 결코 나쁜 놈일 수 없는 거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놔버리기’를 거듭 읽는다. “우리는 같은 행위를 두려움 아닌 사랑으로 할 수 있다. 자기 몸 돌보는 일을 병이나 죽음이 겁나서가 아니라 몸의 소중한 가치를 존중해서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낯선 사람 친절히 대하는 것도 그러지 않으면 무슨 봉변을 당할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차를 조심히 운전하는 것도 교통사고를 겁내서가 아니라 본인과 남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럴 수 있는 거다. 이웃을 돌보는 일도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이 벌하실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으로 하면 효과가 더 크지 않겠는가?”
#어지러운 꿈속에서 반복되는 말 한마디. “밝고 가벼운 것을 받아들여라. 어둡고 무거워지리라. 어둡고 무거운 것을 받아들여라. 밝고 가벼워지리라. 모쪼록 솜털처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태산처럼 무겁게 처신하여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아무리 살펴도 앞뒤가 맞지 않다. 아무튼, 가벼운 마음으로 무겁게 처신하라는 말에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삶의 진정한 기술이 말법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오프라 윈프리 글을 옮기는데 코허리가 시큰하다. “내가 이룬 최고의 성취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늘 향해 가슴을 닫아걸지 않았다는 바로 이것이다. 내 생애의 더없이 캄캄한 순간들, 성폭행당하고 열네 살에 임신하고 속고 배신당하고 그러면서 보낸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도 나는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았고 사람들이 최악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어도 어쨌든지 그들의 가장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믿고 또 믿었다, 아무리 벼랑이 험난해도 어김없는 밝은 빛이 내 앞길을 인도하리라고.”
#불경(佛經)에서 한 말씀 옮겨 적는다. “땅 위의 모든 개울이 바다에 이르면 한 이름 한 맛으로 통일되듯이 사람이 길을 떠날 때는 서로 달라 이는 지혜롭고 저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마침내 더없이 깊은 데로 들어가면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사이에 아무 다른 바 없음을 깨치게 된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게 그거라는 앎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만큼 ‘더없이 깊은 데’로 가까워진 것이라?
글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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