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국회 견제 ‘최후 보루’… 협치 실종 탓 일상화 우려 [심층기획-대통령 ‘거부권’의 정치학]
민주화 후 대부분 ‘여소야대’ 배경 작용
‘대북송금 특검법’ 등 정치적 사안 많아
전문가 “칼은 칼집에 있어야 무서운데
정치권 상식 사라지자 ‘뉴노멀’ 된 상황”
대화·타협으로 정치 본연 기능 회복해야
지난 4월 야당이 양곡관리법에 이어 간호법, 방송법,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 등에 대해서도 강행 처리를 예고하자 윤석열 대통령은 “여야 숙의 없이 의석 수로 밀어붙인 법안은 100%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통령에게는 의회에서 만든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이 주어진다. 이를 행사하겠다는 발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다.
9일 국회사무처 의정자료집과 입법조사처의 ‘역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해외사례’(전진영 박사)에 따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문재인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총 12인의 대통령 중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여기에 윤석열정부 들어 2번의 거부권을 포함하면 총 68건이다.
이 가운데 45건은 초대 대통령 때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건, 노태우 전 대통령 7건, 노무현 전 대통령 6건, 이명박 전 대통령 1건, 박근혜 전 대통령 2건 등이다. 거부권은 헌법 53조에 의해 부여된 입법부에 대한 견제 수단이다. 국회에서 의결된 법안이 정부로 이송되고, 대통령의 서명과 함께 법률로 공포된다. 이때 법률에 이견이 있을 경우 15일 이내에 국회에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이것이 거부권이다. 재의 요구된 법안도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 재의결하면 법률로 확정된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배경에는 결국 ‘여소야대’의 정치 지형이 존재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현재까지 거부권이 행사될 당시 집권 여당의 의석 수 비율을 살펴보면 13건은 집권 여당이 원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시기였다. 다만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행사한 3건의 거부권은 집권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 거부권 행사 사례 중 25%인 4건은 국정감사, 조사법, 국회 증언감정법, 국회법 등 국회 의정 활동과 관련한 권한과 절차에 관한 법이었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안에는 제한이 없다. 과거 사례를 보면 위헌 가능성이나 재정 부담 우려, 정치적 판단 등 다양한 이유로 작동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회 상임위원회가 대통령령이나 총리령 등이 법률 취지나 내용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에 대해 위헌 가능성을 언급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택시를 대중교통에 포함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대중교통 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에 대해 과도한 재정 부담과 형평성을 이유로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냈다.
전문가들은 여야 협치가 실종되면서 거부권이 일상화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를 해결할 묘수도 결국 정치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통화에서 “거부권은 대통령이 행사하지만, 그것을 사실상 사용하도록 유도한 건 야당일 수 있다”며 “미국의 사례를 보면 정치전략 이론 중 하나로 정립돼 있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거부권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중도층이 떨어져 나가는 악수지만, 야당 입장에서는 지지층의 지지를 얻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며 “간호법처럼 이익집단과 관련된 법안에서는 더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거부권’이나 ‘탄핵’ 같은 제도는 원래 입법 취지를 보면 비상시에 대비한 것들인데 지금 정치에선 너무 일상화하고 있다”며 “정치권에서 상식이 사라진 것이 오히려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거부권은 원래 그것을 사용하겠다는 말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무서운 것’인데 지금 정치는 칼을 빼 들어도 효과가 없는 지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윤 실장은 “정치가 양극화하면서 대화와 타협이 사라졌고, 오히려 정치인들이 비밀리에 만나야 하고, 만나는 것이 뉴스가 되는 현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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