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여자들, 고정관념에 갇힌 ‘성 역할’ 탈출시키다
넷플 예능 ‘사이렌: 불의 섬’
<사이렌: 불의 섬>은 넷플릭스(OTT) 10부작 여성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다. 무인도에서 여성 참가자 24명이 극한의 전략 게임을 펼친다. 몸 쓰는 일이라면 질 수 없는 군인, 경찰, 소방관, 운동선수, 스턴트맨, 경호원이 4명씩 조를 이뤄 경기를 펼친다. 시작부터 고난의 행군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길고 무거운 깃발을 메고 섬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도끼로 장작을 패서 불 피우고 끄는 일, 땅 파는 일, 몸싸움해 기지를 빼앗는 일 등이다.
참가자들은 직업의 명예를 걸고 승부에 임한다. 시청자는 참가자들의 행동에서 직업적 특성을 발견하며 재미를 느낀다. 가령 경찰팀은 사소한 것에서 정보를 얻는다. 어느 팀이 “선배”라고 부르고 어느 팀이 “언니”라고 부르는지 기억해서 어둠 속 상대를 구분한다. 소방팀은 사이렌 소리에 가장 빠르게 출동 준비를 마치고, 소방 호스를 잡으면 눈빛이 변한다. 군인팀은 항상 남들이 보지 못하게 등을 돌리고 의논하면서 다른 팀의 정보를 캐기 위해 노력한다. 승리욕에 불타지만 협상에는 무능하다. 스턴트팀은 힘들 때 구령이 “슛, 레디, 액션”이다. 운동팀은 역시 1 대 1로 붙었을 때 피지컬이 가장 좋다. 경호팀은 남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데 진심이다.
이들의 직업적 행동, 팀워크, 개성, 전략, 동맹 등에 몰입해서 보노라면 이들이 모두 여자임을 어느 순간 잊는다. 그냥 직업인이 있을 뿐이고, 성별은 의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장작을 패던 강은미가 웃통을 벗어젖혀도 호쾌하다는 생각이 들 뿐, 섹슈얼하거나 창피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관음의 대상이 아닌, ‘건강하고 효능감 있는 몸’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것은 놀라운 시선의 경험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직업인이 아니고, ‘여자’로 특정된다. 남초 사회에 한두명 끼어 있는 여성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여자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러곤 성 역할이 부여된다. 성 역할에 맞게 행동하면 점차 입지가 좁아지고 어느 날 희롱이 찾아든다. 성 역할에 맞지 않게 행동하면 “여자도 아니”라며 비난이 들어온다. 직업 수행에서 그의 단점은 언제나 여자로 환원된다. 반면 성취는 예외로 해석된다. 동료들뿐만이 아니다. 현장에서도 ‘형사’가 아니라 ‘아가씨’로 불리고, 구조하러 간 소방관을 ‘여자’라고 못 미더워하는 일을 수없이 겪는다. 개인의 실수가 ‘여경’ ‘여소방관’의 무능으로 비칠까 봐 몇배나 노력하며 살아간다.
매체에서도 여성은 두드러진 예외처럼 그려지곤 한다. 마치 성별이 없는 스머프 마을에 스머페트만이 여성임을 강조하듯이. 여성은 긴 머리에 긴 속눈썹을 타고나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신체적 특징인 양 간주하고, 여성의 신체는 언제나 관음의 대상인 양 카메라가 훑어댄다. 그러곤 여성을 배려한답시고 여성은 감정적이라느니 예민하다느니 아무 말이나 해댄다.
하지만 <사이렌: 불의 섬>을 보라. 모두가 여자라서 더는 여자임이 눈에 띄지 않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냥 인간이 보인다. 여기서 보이는 인간은 그동안 매체에서 그려지던 ‘여성’이 아니다. 힘쓰는 걸 좋아하고, 소속감을 원하며, 직업적 사명감을 느끼고, 승리를 갈구한다. 팀원을 위해 헌신하고, 협력하며, 한번 맺은 동맹을 소중히 여기고, 신의를 지킨다.
여자가 갯벌을 구르고 장작을 패니 놀라운가. <사이렌: 불의 섬>은 그것을 호기심이나 호들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교를 위해 2021년 <골 때리는 그녀들>(SBS) 맛보기(파일럿) 방송을 떠올려보자. 여자들이 축구 한다는 것을 남성 스포츠의 패러디인 양 히죽거리며 놀라워하던 이수근의 해설 따위가 아예 없다. 또한 참가자를 계속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로 호명하거나 가족을 등장시켜 그들을 애처롭거나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일절 두지 않는다. 남성이나 가족을 통해 여성을 보는 시선을 불필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체에서 강한 여성의 신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분열적 형태의 드라마 <역도요정 김복주>(2016, MBC)나 반어적 형태의 <힘쎈 여자 도봉순>(2017, JTBC)이 나왔을까. ‘힘센 여자’는 자기 신체를 부정하거나, 완전한 비현실 속에서만 상상되었다. 2020년에 와서야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웹예능), <노는 언니>(E채널) 등을 통해 자기 신체를 긍정하는 현실적 형태의 ‘힘센 여자 상’이 받아들여졌다. <사이렌: 불의 섬> 이후로는 근육질의 여자가 도끼로 문을 부수고, 맨손으로 땅을 파고, 그라운드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멋지고 부러울 뿐이다. 여성 신체상에 획을 긋는 콘텐츠임이 틀림없다.
스튜디오 모닥의 남성 피디들이 <성+인물>(넷플릭스)을 만드는 동안, 여성 피디들은 <사이렌: 불의 섬>을 만들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성인지의 차이가 성취물의 차이를 만든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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