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폴 크루그먼이 2023년 AI 웹툰 본다면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3. 6. 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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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 ‘AI 웹툰 보이콧’은 동전의 양면

● “AI는 그림을 무단 도용할 뿐”
● 테드 창과 비트겐슈타인의 생각
● AI가 언어 구사? 엄밀히는 오류
● 그럼에도 ‘학습’은 일종의 ‘은유’
● 가뭄의 단비 혹은 신성 모독

최근 발생한 ‘AI(인공지능) 웹툰 보이콧’과 그간 AI를 활용한 창작물 관련 논란 사례. [동아DB]
"AI는 그림을 학습하지 않습니다. 무단 도용할 뿐입니다."

6월 2일 네이버 웹툰 '도전만화' 코너에 같은 썸네일을 가진 작품이 한꺼번에 등록됐다. 작가들이 합심해 'AI 웹툰 보이콧'이라는 게시물을 동시에 업데이트한 것이다.

작가들의 주장을 정리해 보자. AI(인공지능)가 그림을 학습해 창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AI는 기존의 웹에 올라와 있는 그림들을 합성해서 출력할 뿐이다. 따라서 어딘가에 원작이 있다. 그 원작은 사람이 그린 것이므로 AI를 이용한 그림의 생성은 결국 어떤 사람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런 반발이 나오게 된 것은 네이버가 AI를 이용한 웹툰 창작을 허용할 뿐 아니라 AI를 이용한 창작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보이콧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네이버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동의해야 하는 약관 조항을 문제 삼고 있다.

네이버는 인공지능 분야 기술 등의 연구개발 목적으로 웹툰 작가나 블로그, 카페 사용자 등등이 제공하는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약관에 담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콘텐츠를 이용해 AI를 학습시키고, 그 AI가 생성해낸 텍스트와 이미지를 네이버가 상업적으로 이용하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안은 AI의 상업적 연구와 이용에 대한 조직적 반발의 최초 사례로 꼽힐 만하다. 국내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있지 않으나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지난해 11월 30일 챗GPT가 공개된 후 AI에 대한 수많은 담론이 오갔으나, 실제 현장에서 반대 목소리가 조직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보이콧이 네이버, 혹은 다른 웹툰 사이트와 웹툰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대신 우리는 진행 중인 이 사건을 통해 AI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또 나아가야 할지, 그리고 기술 발전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일자리를 위협하며, 어떤 새로운 생산 방식과 수요를 창출할지 등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기계는 '배운다'고 할 수 없다"

6월 2일, 세계적인 경제 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즈'에 한 인터뷰가 실렸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과학 소설 작가 테드 창이 인공지능과 정신, 의식 등의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테드 창은 현재 컴퓨터, 기계는 '배운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논할 때 '배운다, 학습한다, 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그 기계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비판이었다.

테드 창이 인터뷰에서 직접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 철학을 연상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를 '문법적 착각'에 빠뜨리고, 우리가 세상을, 세상과 우리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을 방해한다고 지적한 바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도전만화'의 보이콧 만화에서 주장하는 바도 그와 유사하다. 엄밀히 말하면 AI가 그림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AI를 통한 이미지 생성 방식을 기술적으로 놓고 보면 그렇다. AI는 이미 존재하던 이미지를 저장하고 분석한 후 그 위에 작은 변형을 가하는 식으로 새로운 결과물을 창출해낸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AI가 학습 대상으로 삼는 텍스트가 있고, 그 텍스트에서 많이 사용되거나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는 단어들을 분석해, 확률적으로 가장 가까운 단어를 연이어 배열하는 식으로 문장을 생성하는 방식이 가장 흔히 쓰인다. 대규모 언어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의 작동 방식을 아주 단순하게 서술하자면 그렇다.

그러므로 AI가 그림을 창작하거나 언어를 구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오류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언어 학습의 재료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을 창출해낸다는 점에 그 특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챗GPT에 사용된 언어 모델 GPT-3는 10대 청소년이 접한 언어의 1000배가량을 입력받는다. 반대로 얘기하면 10대 청소년은 GPT-3에 입력돼 있는 언어의 1000분의 1만으로도 충분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언어를 구사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없는 단어를 창출해내고, 주인 말을 만들어내고, 씨를 짓는 등 우리가 아는 창조적 언어활동을 모두 해낼 수 있다.

아예 틀렸다고 하기도 애매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학습'의 엄밀한 의미를 고수하는 것은 AI 논쟁에서 핵심 쟁점이 아니다. 모든 단어의 의미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AI가 사람처럼 배우고 사람처럼 창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면 AI를 이해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어린이는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린다. 그러다가 그림이 아니라 현실의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단지 어린아이들만 이런 식으로 그림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창작의 첫걸음은 습작·모작이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베끼면서 배운다. AI가 '학습'한다는 말은, 완벽하게 옳은 말은 아니지만, 아예 틀렸다고 하기도 애매한 일종의 '은유'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두 번째 문제가 파생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적 생산품 중 상당수 혹은 대다수는 엄청난, 혹은 '인간적'인 창의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틀에 박힌 문구를 매일 접한다. 어제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표현을 구사하며, 어디서 본 것과 다르지 않은 사진과 그림 등을 광고나 영상을 비롯한 경로로 접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만들고 소비하는 창작물 중 상당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거나 전혀 새로운 맥락을 창출하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와는 거리가 있다. 진지한 고민을 통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조에 도달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사실 그렇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AI가 지니는 파괴적 속성이 드러난다. AI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희곡과 소네트를 지어내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투어로 점철된 비즈니스 메일이나 공문서 작성 정도라면 AI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순식간에 그럴듯한 말을 지어낸다는 점에서 어지간한 신입사원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보여줄 가능성도 상당하다.

실제로 과학계에서는 AI를 통한 글쓰기가 널리 활용되고 있다. 실험과 숫자에 익숙하지만 글쓰기가 낯설고 힘든 과학자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하면 그것을 평범한 일상 언어로 바꿔주는 챗GPT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필자처럼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 진지한 '창작'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사람에게 챗GPT로 대표되는 AI 생성 문장은 일종의 신성 모독처럼 보인다. 반면 그저 업무상 처리해야 하는 글쓰기에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셈이다.

어느 경제학자의 우울한 전망

미국 콜로라도 주립박람회 미술대회 디지털 아티스트 부문 1위를 차지한 회화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문장을 입력하면 그림으로 변환해주는 AI 서비스 ‘미드저니’로 제작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AI로 만든 작품을 예술로 볼 수 있는지 논쟁이 벌어졌다. [트위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AI의 사용이 일반화되는 것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긍정적인 면을 우리는 방금 살펴봤다. 사무직 노동에서 '잡무'에 해당하는 것 중 상당수를 AI에 넘길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변화를 한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사무실에서 커다란 장부책과 주판 등이 사라지고, 대신 엑셀 같은 스프레드시트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무, 전산 처리를 하게 된 것과 같은 방향인 셈이다.

AI를 통한 이미지 생산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조선일보'는 몇몇 기사에서 AI 서비스 '미드저니'를 통해 생성한 이미지를 첨부한 바 있다. 삽화가가 그려내는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기사의 내용을 전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방증이다.

광고계에서도 AI를 이용한 이미지가 활용되기 시작했다. 어떤 모델이 찍어도 상관없는 광고는 이미 AI 모델의 사용이 현실화되고 있다. 비용을 10분의 1에서 100분의 1까지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대단히 아름답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모델, 혹은 이미 충분한 인지도를 지니고 있는 유명 모델이 아닌 이들은 생계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추세는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예견되고 있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1996년 인터넷 매체 '슬레이트'에 기고했던 칼럼에 따르면, 정보통신 기술로 인한 복제 가능성의 무한 확장은 예술가의 소득 구조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한국어로는 "과거를 돌아보며"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에 수록돼 있다.)

과거, 20세기 중후반까지 예술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콘텐츠가 담겨 있다는 이유로 별것 아닌 물건을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별로 가치가 없는 종이 뭉치, 우리가 레코드라고 흔히 부르는 동그란 석유화합물 판자, 음악이 담긴 테이프나 CD 같은 것들이 바로 그렇다. 그런 제품들은 물건만 놓고 보자면 별 가치가 없지만 그 안에 노래나 책, 기타 콘텐츠가 담겨 있다는 이유로 비싸게 팔렸다. 그렇게 20세기의 아티스트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 들을 수 있는 음악이 공짜로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는 심지어 스마트폰이 출현하기 전부터 시작된 현상이다. 인터넷의 대중화로 그러한 방향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예술가가 적은 수의 팬만을 염두에 둔 채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창작을 할 수 있던 시절은 20세기 중후반의 짧은 시기에 국한됐다. 극소수의 스타를 제외하면 예술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창작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점점 더 희귀해지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1996년, 폴 크루그먼이 내놓았던 우울한 전망이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 공격받다

AI라는 새로운 도구의 출현은 그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 여겨지던 창작 분야가 기술 발전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AI를 이해하고 그 여파를 최소화하며 적응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네이버 '도전만화' AI 보이콧 사태를 '찻잔 속의 태풍'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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