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 일부는 ‘곰팡이’ 향기래…잘 자라게 해줘 고마워 [ESC]

한겨레 2023. 6. 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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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빗속의 산딸나무
생태계 유지해주는 미생물
난초씨앗 발아실험, 멸균 집중하다 실수
식물 성장 돕는 곰팡이·박테리아 많아
6월의 숲, 이들이 만드는 향기로 가득
눈이 내린 듯 만개한 산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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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실험을 했다. 실험 결과를 몇 달 뒤에나 알 수 있기에 서둘러야 했다. 꼼꼼하게 순서대로 진행 중이었는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고온멸균기에 적합하지 않은 플라스틱 실험용기를 넣어버린 것이다. 멸균기를 열어보니 공들여 준비한 실험 시료가 녹아버린 플라스틱 용기와 엉겨 이상한 덩어리가 돼 있었다. 동료들은 그걸 보고 “예술작품, 맛있는 요리 같다”며 나를 놀렸다. 그러면서 다들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동료들의 위로를 받으며 그 이상한 덩어리를 기념비처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산딸나무의 화려함

실험에서 실수나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만나는 건 과학자들에게 익숙하다. 대개 크게 낙담하지 않고 덤덤하게 실험을 다시 한다. 실험의 실패든 성공이든 그 끝엔 늘 깨달음이 있으니까. 나도 웃어넘기며 다시 시작하는 편이지만 이틀 동안 계속 실험만 한 터라 맥이 빠진 건 사실이었다. 나는 실험 생각을 떨쳐버리려 산책을 나섰다. 드넓은 벌판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 숲 속으로부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커지는 소리와 함께 숲 속은 뿌옇게 안개로 덮였고 그 소리와 안개는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방으로 지평선이 펼쳐진 곳이라 멀리서부터 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곧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고 나는 근처 문 닫힌 박물관에서 비를 피했다. 6월의 퍼붓는 빗줄기는 더는 다정한 봄비가 아니다. 그치지 않는 빗줄기 속에서 박물관 정원 한쪽에 비를 맞고 있는 거대한 산딸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초록이 가득한 6월에 빛나는 하얀 꽃을 가득 피워내는 산딸나무는 단연 돋보인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그치지 않는 비에 산딸나무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결국 다시 실험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릴 때 비 냄새를 좋아했다. 비 냄새의 원인 중 하나가 토양 속 박테리아와 곰팡이의 냄새라는 걸 알았을 때 놀랐다. 토양뿐 아니라 공기와 빗방울에도 미생물이 있다. 꽃향기 중엔 꽃이 아닌 꽃에 있는 미생물 향기인 경우도 많다. 꽃가루를 옮겨주는 동물이 꽃가루와 함께 향기 나는 미생물을 전해주기도 한다. ‘향기 배달부’인 셈이다. 식물의 잎과 줄기, 뿌리에도 미생물이 함께 살고 있다. 식물의 표면뿐 아니라 식물의 몸속에도 말이다. 꽃이 가득 핀 산딸나무는 초록색 나무에 흰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하얀색으로 장관을 만들어내는 건 사실 꽃이 아니다. 4장의 크고 흰 꽃잎처럼 보이는 건, 작게 피어나있는 연한 초록색의 ‘진짜 꽃’을 둘러싸고 있다. 산딸나무의 이런 ‘포’(bract)는 작은 꽃 무리를 돋보이게 한다. 동물이 꽃을 잘 찾아갈 수 있도록. 예전에 읽은 논문 중에 이런 하얀 꽃받침에서 디엔에이(DNA)를 뽑아 실험한 논문이 떠올랐다. 과학자들은 알코올로 식물을 잘 닦아 소독한 뒤 디엔에이를 뽑는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죽이고 깨끗한 식물 디엔에이를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렇게 추출해도 식물 몸속에 있는 곰팡이와 균의 디엔에이도 섞여 있기 마련이다. 미생물은 식물과 도움을 주고받거나 피해를 주기도 하며 때론 그냥 함께 있다. 비를 맞고 있는 거대한 산딸나무가 갑자기 새롭게 보였다. 물안개 속 거대한 산딸나무가 미세한 생명체로 넘실거리는 듯한 착각이 든 것이다.

씨앗, 곰팡이 그리고 박테리아

이런 생각들이 떠오른 건 내 실험과 관련이 있어서다. 내 실험은 이론적으로는 아주 간단하다. 난초 씨앗을 발아시키는 실험인데 원리를 보면 초등학교 때 강낭콩을 젖은 솜 위에 올려 새싹을 틔워내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이 실험이 까다로운 이유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무균 상태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난초 씨앗에 특정한 미생물만 만나게 해 주는 것. 완전한 무균 상태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실험에 사용되는 공간과 도구, 내 손조차 모두 무균 상태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멸균기, 알코올, 살균제, 무균 실험대, 불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 주변에 넘쳐나는 미생물 중 어떤 생물은 죽이고 어떤 생물은 살리는 것도 어렵다. 단 하나의 미생물만 분리해 키우는 건 가끔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작은 움직임과 접촉에도 매우 예민해져서 끊임없이 알코올로 손을 소독하며 내 손과 팔이 지금 과연 무균 상태인지, 내가 딱 한 종류의 미생물만 얻은 게 맞는지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는 무수한 생명체들로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 결국 멸균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초보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난초 씨앗은 스스로 싹을 틔울 영양분이 부족해 특정 곰팡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곰팡이는 난초 씨앗에 외부 영양분을 전달한다. 그리고 많이 연구되지 않았지만, 그 곰팡이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특정한 박테리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박테리아는 곰팡이를 도와주고, 곰팡이는 난초를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를 생각해 보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 미생물들은 무척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산딸나무, 난초와 같은 생물도 만날 수 없다. 쏟아지는 빗방울, 피어오르는 물안개, 비를 흡수하는 흙, 만개한 산딸나무의 꽃, 꽃가루를 옮기는 동물들, 빗속에 서 있는 거대한 산딸나무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이 가득하다. 이들에게 진저리를 친 게 갑자기 미안해진다. 비를 맞고 있는 산딸나무가 작은 생명체들로 넘실거리는 듯한 환상을 보았을 때, 나는 다시 실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가 그치고 실험실로 돌아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이 뿜어낸 신비로운 향기로 가득했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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