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세포 단련’ 3종 세트로 치매 예방, 도전해 볼 만하다

박중언 2023. 6. 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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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언의 노후경제학]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박중언의 노후경제학
P부장의 80대 후반 노모가 천자문을 공책에 쓰고 있다. 박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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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P부장의 80대 후반 노모에게 두 가지 일상(루틴)이 있다. 하나는 기도다. 종교는 힘든 지난날은 물론 더 살 이유를 찾기 어려운 요즘을 지탱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다.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기도문을 외우며 자녀·손주의 무탈을 빈다. 기도문 암송과 성경 읽기는 기억력 퇴화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른 하나는 천자문(天字文) 쓰기다. 손녀 책상에서 포켓용 천자문에 실린 한자를 보면서 하루 150~200자씩 또박또박 눌러 쓴다. 손주가 더는 사용하지 않는 공책에 한자를 빼곡하게 적으며 뜻, 음, 쓰는 차례를 되새김질한다. 아흔이 다 된 노모가 한자를 공부해 쓸 데는 없지만, 치매 예방에 효과 있다는 P부장의 얘기를 듣고 몇 달 전부터 시작했다. 노모는 한때 천자문을 모두 외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가족 밥벌이를 위해 가게를 운영하던 시절 손님이 없는 무료함을 천자문으로 달랬다. P부장은 노모에게 가장 친숙한 천자문을 택해 기억세포 단련을 권했다.

시 암송으로 해마 공략

치매를 막는 데 도움되는 뇌 기능 강화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운동으로 뇌세포 전반을 활성화하는 것과 인지활동으로 뇌세포를 자극하는 것 등이다. 계산, 단어 퀴즈, 무늬 맞추기 등의 과정에서 인지기능을 관장하는 뇌세포의 움직임이 활발해진다는 사실은 자기공명영상(MRI)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두뇌게임이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도 적지 않다.

치매 방지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확실한 예방 수단과 치료제가 없는 현재로선 뇌세포 기능 강화가 최선이다. 연산, 판단, 추리, 언어 같은 인지기능 대부분을 대뇌 전두엽이 맡지만, 기억은 해마의 몫이다. 컴퓨터에서 시스템 전체를 제어하고 핵심 기능을 하는 중앙처리장치(CPU)가 전두엽이라면, 메모리에 해당하는 것이 해마다. 따라서 전두엽보다 해마의 기억세포를 직접 자극하는 활동이 치매를 막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치매 연구에 ‘진심인’ P부장은 언어 암기를 통한 기억세포 단련을 권장한다. 기억 과정은 인지-부호화-저장-인출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인간은 쉽게 휘발하는 단기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 언어나 시각(이미지)적 방법으로 부호화한다. 언어를 통한 저장이 압도적으로 많다. 기억한 것을 끄집어낼 때도 언어로 표현·묘사·설명한다. 기억력이 떨어질 때 단어가 혀끝에서 맴도는 설단현상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학입시까지 거의 모든 공부를 암기식으로 한다. 암기를 잘할수록 좋은 성적을 얻기에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주입식 암기는 창의성을 질식시키는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다. 그런데 각종 취업·자격시험 등을 거쳐 직업을 가진 뒤로는 직장에서든, 일상에서든 애써 외울 일이 별로 없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기억세포가 급속하게 퇴화하는 것이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비롯해 학식이 뛰어난 치매 환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적 능력과 기억력 유지는 비례하지 않는다. 치매 예방을 위해 이해하는 공부가 아니라 기억력 강화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종영한 코미디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수다맨처럼 지하철역 이름을 외우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암기가 훨씬 바람직하고 동기부여도 된다. 마음에 드는 시를 외우는 것, 암송이 대표적이다. 아름다운 시어로 내면이 충만하고 정서가 고양되는 효과를 함께 얻을 수 있다. 짧은 시부터 시작하면 부담이 적고 성취감이 빨리 온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 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1) “연탄재 발로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조금씩 익숙해지면 외우는 시의 분량과 편수를 늘린다. ‘별 헤는 밤’(윤동주)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도종환)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등이 도전해볼 만한 시다. P부장은 100편 가까운 시를 외운 적이 있다. 암기를 무한정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기억 능력을 계속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기억력 쇠퇴에 무방비 상태라는 두려움, 초조함과 젊은 시절에도 엄두를 내지 못한 시 외우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천양지차다.

다음은 좋은 글귀를 ‘손으로’ 쓰는 것이다. 암송을 통한 입-귀-머리의 공명이 시에 어울린다면, 산문은 쓰면서 담긴 뜻을 깊게 음미하는 게 제격이다. 쓸 때 집중력이 발휘돼 짧은 글은 쉽게 외울 수도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명심보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라인홀드 니부어 기도문) 에세이와 소설 한 대목을 정성스레 쓰는 동안 기억세포가 활성화하고 생각이 깊어지며 마음은 정갈해진다.

외국어 배우기

이미 익숙해진 모국어는 생각보다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때때로 ‘설화’를 부른다. 반면 외국어는 아무리 외워도 한마디조차 하기 어렵다. 또 외우려 애쓰지 않아도 외국어를 읽고, 듣고, 쓰고, 말하는 순간 뇌에서 기억장치가 작동한다. 기억세포가 부지런히 움직여 이전에 기억한 내용을 검색해야 해석이든 표현이든 할 수 있다. 외국어 단어·표현을 외우고 잊는 과정은 기억세포를 끊임없이 훈련시킨다.

외국어 공부 환경은 상전벽해라고 할 만큼 좋아졌다. 인터넷에 무료 독학이 가능한 자료와 프로그램이 넘친다. 구글 번역기와 네이버 파파고는 초보자가 외국어 문구를 이해하는 데 드는 수고를 확 줄였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동영상 서비스는 영화·드라마의 재미와 외국어 공부의 두 토끼를 잡게 해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마음에 드는 시 외우기와 글귀 쓰기, 외국어 배우기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그 리스트를 지우는 행복과 더불어 치매 예방 효과까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P부장이 시 외우기와 외국어 공부를 날마다 하는 이유다. 좋은 글귀 쓰기는 여유 시간이 훨씬 많은 퇴직 뒤를 위해 미뤄두었다.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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