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서 발견된 의문의 백골…알고 보니 아동 연쇄살해범?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6. 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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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25] “드디어...드디어 찾았어요.”

2012년 2월 영국 레스터 지역 한 주차장. 무언가를 발견한 한 여인의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10년이 넘게 찾던 걸 발견해서였습니다. 그녀 눈길에 놓여있던 건 새하얀 백골. 주변 인부들 역시 그녀의 흐느낌에 숙연한 표정을 지었지요. 백골의 주인은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지독한 빌런으로 통하는 ‘리처드 3세’였습니다. 사람의 뼈를 보고 눈물짓던 여인은 다큐멘터리 작가였던 40대 여성 필리파 제인 랭글리.

BBC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에서 리처드 3세를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 <사진 출처=IMDB>
리처드 3세는 영국 역사에서 이름난 폭군이었습니다. 흉측한 외모에, 조카까지 살해하면서 왕위를 차지한 권력지향형 인물이었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단종을 내쫓은 세조와 광기에 젖은 연산군을 합친 위인이라고 할까요. 왜 그녀는 리처드 3세의 백골을 보고 눈물을 지었을까요.
영국 레스터 주차장에서 발견된 리처드 3세의 유골. <저작권자=Richard Buckley, Mathew Morris, Jo Appleby, Turi King, Deirdre O‘Sullivan, Lin Foxhall>
그녀가 리처드 3세에 빠져든 건 단순히 해골을 사랑하는 변태적 성향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998년 처음 리처드 3세의 이야기를 접한 뒤 역사가들이 그를 왜곡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악명으로 점철된 리처드 3세를 복권하기 위해 그녀는 문헌을 찾았지요. 10년이 넘는 연구 끝에 그의 유골을 직접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폭군 중 폭군이지만, 그만큼 강력한 팬덤을 보유했다는 방증입니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하얀장미 요크가문 왕좌에 도전하다
“어머니의 자궁을 나올 때부터 이미 세상을 물어뜯을 이빨을 가지고 태어난 기괴한 인물.”

셰익스피어의 사극 ‘헨리 6세’ 파트3에서 리처드 3세를 묘사한 대목입니다. 그의 설명처럼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악인으로 통하지요. 리처드 3세 이후 영국 어느 군주도 리처드를 왕명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의 인기를 잘 알 수가 있지요.

영국의 내전인 장미전쟁을 묘사한 그림. 리처드 3세는 요크가문의 아들로 형 에드워드 4세의 즉위를 도왔다.
그의 왕관에서는 피 냄새가 물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내전 ‘장미 전쟁’의 직전이던 1452년이었지요. 그로부터 3년 뒤 장미전쟁이 본격 서막을 올렸습니다. 왕이었던 헨리6세가 정신병으로 제대로 된 통치를 불가능하게 되면서 분쟁이 시작됩니다.

왕의 일가였던 랭커스터 가문과 그 친위 귀족들이 요크 가문과 일대 전쟁을 벌였지요. 이들 가문의 상징이 각각 빨간 장미와 하얀 장미였기에 장미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투를 벌이는 리처드 3세.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의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역사의 물결은 요크로 흘러갔습니다. 지지기반이 탄탄한 요크 가문이 잇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헨리 6세를 사로잡았지요. 결국 헨리 6세는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촌이었던 에드워드에게 왕관을 넘겼지요. 에드워드 4세의 시대이자, 요크 왕조의 태양이 밝았던 시기 입니다. “불만의 겨울은 요크 가문에 의해 영광의 여름이 되었”지요.(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1막 1장 中)
요크왕조를 배신한 요크 사나이 리처드3세
배신은 배신을 낳고, 반정은 또 다른 반정을 부릅니다. 에드워드 4세가 이른 나이에 승하하자, 새 왕조의 지지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지요. 그에게 남겨진 아들이 12살의 어린 에드워드 5세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드4세의 동생이자, 에드워드 5세의 삼촌인 리처드는 생각합니다. “이 애송이만 없어진다면 잉글랜드의 왕관은 내 것일 텐데.”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그린 ‘타워 안의 왕자들’. 리처드 3세가 폐위시킨 왕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1878년 작품.
조카인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을 런던탑에 가둔 채, 섭정(Lord Protector)인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지요.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이 ‘서자’인 탓에 왕의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장미전쟁의 승리자였던 요크가문은 이렇게 스스로 분열합니다. 1483년 6월 리처드3세 시대의 막이 올랐습니다. 탑에 갇힌 왕자들은 얼마 후 살해당한 걸로 전해집니다. (비슷한 시기에 8000km 떨어진 조선에서도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켰지요.)

리처드 3세 초상화. 16세기 후반 작품. 영국국립초상화갤러리 소장품.
“리처드 3세는 반역자다”
어린 왕 에드워드를 런던탑에 가둔 채 죽인 리처드 3세를 향한 반감은 고조되어 갔습니다. 즉위한 지 4개월만에 반란(버킹엄 반란)이 일어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왕좌에 오른 지 2년이 막 지났을 무렵,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부글부글 끓던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자가 나타났지요. 헨리 튜더 였습니다.
리처드 3세가 최후를 맞은 보스워스 전투를 묘사한 그림. 토마스 패넌트가 18세기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는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리처드 3세를 공격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양측이 격돌한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3세는 전사했습니다. 머리뼈에 도끼와 칼을 맞은 뒤였지요. 암군의 퇴장이었고, 튜더 왕조가 잉글랜드의 권력을 잡은 순간이었습니다.
리처드 3세 악마화에 돌입하다
전쟁은 칼로 시작해 펜으로 끝나는 법입니다. 튜더왕조는 리처드 3세를 악마화하는 작업에 돌입하지요. 지금의 정치인들이 전임 정권을 폄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표적 인물이 헨리 8세 시대의 토머스 모어였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시대의 지성이었지요.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주군을 우상화하기 위해 전임을 깎아내리는 데 능력을 바쳤지요. “키가 작고, 다리는 불균형이며, 다리는 굽었고, 얼굴은 추하다”고 토마스 모어는 썼습니다.

BBC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은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심한 척추옆굽음증을 앓는 리처드 3세를 연기했다. <사진 출처=BBC>
기존 왕을 죽이고 새 왕조를 연 만큼 그에 걸맞은 반정의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수많은 글쟁이가 ‘튜더 신화’를 만드는 데 동원됐지요. 리처드를 악마화할수록, 헨리 7세의 반란은 ‘신의 자명한 섭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근대 영어의 기틀을 마련한 대문호이지만, 집권세력인 튜더왕조의 집권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전임 왕조를 폄훼하는 역사서를 쓰기도 했다.
후임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는 한발 더 나아갑니다. 사극 ‘리처드 3세’를 통해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내지요. 권력을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악을 행하기 위해 권력을 탐하는 인간처럼 묘사합니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처럼 말입니다. 한 대목을 보시지요.
“나는 기형이고, 미완성이고, 반도 만들어지지 않은 채너무 일찍이 이 생동하는 세계로 보내져쩔뚝거리고 추한 나의 모습에곁에만 지나가면 개들도 짖는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
리처드 3세 구하기 나선 사람들
그러나 지나친 악마화는 또 다른 반론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200년이 흐른 뒤 하노버 왕조 시기부터 리처드 3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생겨났지요. 튜더왕조도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조카 에드워드를 살해한 건 사실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처럼 살인과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만은 아니라는 항변이었지요.
리처드 3세의 통치시기가 암흑기만은 아니었다. 그는 시민들을 위한 양질의 정책도 시행했다. 사진은 영국 카디프 성에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려진 리처드 3세와 그의 아내 앤 네빌. <저작권자=VeteranMP>
리처드 3세가 재임 기간 중 많은 업적을 쌓은 것도 사실입니다. 1483년 12월 그는 ‘코트 오브 리퀘스트’라는 기관을 설립합니다. 법원에 접근하기 어려운 가난한 서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신속히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기관이었지요. 가난한 사람, 글을 모른 시민, 권력에 접근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남자 아니랍니다” 바델 2세가 그린 리처드 3세 초상화. 1520년대 작품 추정.
이듬해 1월에 통과시킨 공법 15조에는 외국인 상인을 규제하고, 자의적 세금인 덕세를 폐지하는 친시민적 조항들도 담겨 있었지요. 프랜시스 베이컨은 “서민의 안락함과 위안을 추구한 훌륭한 위인”이라고 평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셰익스피어도 거짓말을 한다
2012년 레스터시티 주차장에서 그의 시신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도, 셰익스피어의 묘사가 완전히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리처드 3세의 키가 172cm에 달하는 큰 키였기 때문이지요.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50cm대였다는 걸 감안하면 장신 중의 장신. 척추옆굽음증이 있긴 했지만, 소설 속 묘사처럼 완전히 굽은 모습은 아니었지요.

16세기 역사학자 존 스토우는 “리처드 3세는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대문호라 해도 그의 글이 진실을 담보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리처드 지지자라는 의미의 리카디언이 점점 세력을 불려 나갔지요. 18세기부터 모임이 시작되더니 1924년에는 리처드 3세 협회라는 집단이 나오기도 했죠. 그의 백골을 찾아 헤맨 필리파 역시 리처드 3세 협회의 회원이었습니다.

화가 존 라우스가 그린 왕 리처드 3세와 그의 가족. 1483년 작품.
연극 ‘리처드 3세’, 그 악마화와 신화
리처드 3세가 셰익스피어를 마냥 원망만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저작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극 속에서 그는 잔인한 악당이지만, 동시에 재담과 광대기질을 마음껏 발휘하는 인물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사극 ‘리처드 3세’는 새로운 안티 히어로의 원형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비교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장애를 갖고 태어나,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음모와 악행에 야유를 보내면서도 달변으로 관객에게 말을 던지는 그에게 어느 순간 매료되지요. 이전 어느 작품에서도 이같은 악당은 볼 수가 없었기에 관객은 그에게 어느덧 스며들어갔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사극 중 가장 많이 재해석되는 작품이 ‘리처드3세’ 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지요.
악몽 같은 환상에 겁에 질린 리차드 3세를 묘사한 니콜라이 아빌드가르드의 그림.
어쩌면, 리처드 3세 관련 협회가 생겨난 배경에도 셰익스피어 작품 속 리처드 3세의 모습이 매력적인 악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 특성이 짙은 빌런은 주인공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리처드 3세’는 언제나 대중의 주목을 받는 공연 중 하나입니다.
죽어서도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야기를 잉태해내는 존재입니다. 2012년 유골이 발견된 뒤 우여곡절을 거쳐 레스터시티 대성당에서 안식을 찾게 됩니다. 장례 미사에서 한 남성이 캐럴 앤 더피의 시 ‘리처드’라는 시를 낭독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였습니다. 리처드 3세의 먼 후손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컴버배치는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기반으로 한 BBC 드라마 ‘할로우 크라운’에서 리처드 3세를 연기하기도 했었지요. 등이 심하게 굽은 모습으로 권력을 탐하는 연기는 시청자를 전율에 빠지게 했습니다. 자신의 조상을 폄훼한 셰익스피어의 드라마극을 그 후손이 했다는 점도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레스터시티의 15 16 시즌 우승을 이끈 제이미 바디. <AP연합뉴스>
리처드 3세가 안식을 찾은 그 해, 예상치 못한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유골이 발견된 지역 축구팀인 레스터시티 FC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무려 5000분의 1 확률을 뚫은 것이었지요.

피터 소울스비 레스터시장은 “ 옛 왕의 장례식 이후 도시 전체가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자신감으로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전기 작가 폴 머레이 켄덜은 “리처드 3세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드라마”라고 말했지요. 가디언지는 1면 머릿기사로 레스터시티와 리처드 3세의 초상화를 함께 내걸기도 했습니다.

가디언지는 레스터시티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 리처드 3세의 초상화도 함께 내걸었다. <사진 출처=가디언>
왕의 가호는 유효기간이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레스터시티는 올해 졸전 끝에 2부리그로 강등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레스터시티의 2부리그 강등을 슬퍼하는 꼬마팬. <AFP연합>
셰익스피어의 ‘악마화’를 닮은 우리 정치
리처드 3세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선거 철마다 벌어지는 상대 정치인에 대한 ‘악마화’가 리처드 3세를 향한 저주를 닮아 있어서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정치적 정적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어갑니다. 방식이 다를 뿐, 모두 각자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뛰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우리 정치의 문법이지요.
2015년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담긴 관이 레스터대성당으로 옮겨지는 모습. 그가 사망한지 500년이 지나서였다. <저작권자=kris1973>
미국 전 대통령인 오바마 후보 시절 했던 연설이 떠오릅니다. 이라크전 찬반 여부로 민주당이 분열하던 시기였지요.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 당에는 두 종류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이라크전을 찬성하는 애국자와,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애국자입니다.” 방향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애국을 하고 있다는 통찰이 그에겐 있었습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분열보다는 통합의 목소리를 자주 내는 정치인이었다. 지난해 11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선거운동 행사에 참석해 조 바이든과 인사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이 한마디로 미국 민주당은 조금 더 통합의 길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외침이지요. 아직 우리 사회에는 상대를 악마로만 치부하는 작은 셰익스피어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네줄요약>

ㅇ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폭군 중의 폭군으로 통한다. 등이 굽은 흉측한 외모로도 잘 알려졌다.

ㅇ2012년 리처드 3세의 유골이 한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그는 키가 작지도 않았고 장애가 심하지도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ㅇ리처드 3세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튜더 왕조가 그를 폄훼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ㅇ세상에 악마는 없다. ‘다른 애국’이 있다는 걸 알아야 정치도 진보한다.

<참고문헌>

ㅇ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아침이슬, 2012년

ㅇ박우수,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열린책들, 2012년

ㅇ김문규, 리처드 3세에 나타난 악의 비전: 반복과 고착 무와 무능, 2015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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