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은 나비 ‘박사'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조선 과학자로 나비 연구자 석주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비에 미쳐 살았으며 ‘조선산 접류 목록’을 통해 한반도의 나비를 집대성한 석주명.
나비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를 둘러싼 오해를 풀어본다.
● 의혹 1 ‘나비 박사’라는 별명은 과장됐다.
석주명은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나,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그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현 가고시마대 농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해 함흥을 거쳐 모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했다.
어떤 이들은 ‘박사 학위도 없고 고등전문학교(오늘날의 대학 학부 수준)을 졸업해 교사로 일했던 석주명에게 ‘박사’라는 별명은 과장된 것이 아니냐’라고 그의 위상을 깎아내리려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당대 한반도의 과학기술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36년을 통틀어 의학을 제외한 이공계 박사 학위를 받은 조선인은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학부 졸업생을 다 합쳐도 약 300명 남짓이었다. 일제가 한국인 과학기술 인력의 교육을 억제했던 탓에 이공계 전공 대학 졸업자가 평균적으로 1년에 10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렵게 과학 공부를 마친다 해도 한반도에 과학기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적 일자리가 없었으므로 계속 타국에 머무르며 본의 아닌 유랑 생활을 하는 이도 많았다.
이렇게 과학자라는 존재 자체가 희소했으니 대중들이 과학자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 기회도 거의 없었다. 당시 대중의 과학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원철별’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원철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해 1926년 미시건대 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됐다.
그의 박사 학위논문 주제는 독수리자리 에타(η)별이 밝기가 변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이었다.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존재와 그것이 변광성이라는 사실은 수 천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원철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한반도에 소개될 당시에는 ‘맥동변광성’이라는 그의 연구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원철이 연구한 별은 언론에 ‘원철성(星)’이라고 소개됐고, 대중들은 이원철이 마치 새로운 별을 발견해 이름을 붙인 것인양 받아들였다.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는 박사 학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누군가 한국인으로서 전문적인 과학 연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 연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인정받는 연구라면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나비 박사'라는 별명은 석주명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가 당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흔들림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의혹 2 석주명의 연구는 독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석주명이 나비 박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일본인 연구자의 오류를 지적하는 논문을 내고, 이것이 국제 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은 식민지 한반도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한반도에 오랜 세월 살아왔지만 국제 학계에는 보고되지 않았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이들에게 ‘발견’됐다. 연구자들은 이 동식물을 수집 분류했고 그 결과를 국제학술지에 바로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연구하고 보고할 거리가 무궁무진한 상황은 연구자로서는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들의 연구를 도우며 조수로 연구에 입문한 한국인 생물학도들도 그 경험을 살려 연구자로 발돋움하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를 너무 급하게 진행했다는 것이다. 국제학계에는 한반도의 생태에 대해 연구하는 이가 거의 없었고 신종을 발견했다는 일본인 연구자들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오랫동안 꾸준히 한반도의 곤충을 연구한 석주명이 보기에 이들의 연구는 빈틈이 많았다. 특히 같은 종의 나비를 크기와 색깔 등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신종으로 보고하는 일이 잦았다. 이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너무 적은 수의 표본을 바탕으로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석주명은 전국을 무대로 십여 년간 매주 채집 여행을 다니면서 무려 75만 점에 이르는 나비 표본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 연구자들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표본들의 날개 길이나 무늬의 숫자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기존 연구에서 다른 종으로 분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한 종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이에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석주명은 이 분석을 120여 편의 논문으로 정리해 일본과 조선의 전문 학술지에 발표했고 기존 연구에서 새로 제안한 학명 가운데 무려 844개가 동종이명(同種異名・synonym)으로 밝혀져 학계에서 퇴출됐다. 일본 제국대학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를 석주명이 뒤집은 것이다.
석주명의 연구는 한국과 일본을 넘어 서구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왕립아시아협회에서 석주명의 연구를 영문으로 출판할 것을 권유했고 석주명은 1940년 ‘조선산 접류 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출간해 한반도 나비 연구에서 세계적 권위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런 연구는 단순히 시료의 숫자만 늘린다고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석주명은 엄밀한 통계학을 적용해 시료들을 분석했는데 통계학적 지식을 생물분류학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킨 연구는 서구 학계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연구 방법은 비록 단순하기는 했지만 시대를 앞섰고 또한 지역에 뿌리내린 연구자가 지닌 강점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 의혹 3 석주명은 나비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석주명은 자신의 연구 방법론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연구자라면 ‘조선적 생물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은 다른 과학 분야에 비해 지역성이 강하므로 한반도에 바탕을 둔 한국인 연구자가 식민지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가 나비 연구뿐만 아니라 언어와 민속 등 여러 주제를 연구했던 것도 이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석주명의 다양한 관심 분야는 1930년대 유행했던 ‘조선학 운동’과 연결된다. 한국적인 것의 특징을 이해하고 한국인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음으로써 학문과 문화의 역량을 키우자는 생각이었다.
석주명은 한반도의 나비를 분석하는 데에서 출발해 나비와 관련된 역사 기록을 연구하고 나비를 부르는 각 지역 방언 이름을 수집하고 비교했으며 한국 나비에 순우리말 이름을 지어줬다. 그가 직접 짓거나 정리한 248종의 우리말 나비 이름은 광복 후인 1947년 조선생물학회를 통해 확정됐다. 지역별 독특한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제주도의 방언과 역사 및 문화 연구로도 확장돼 ‘제주학’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석주명이 생각한 민족과 지역은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민족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억압받는 민족이나 차별받는 지역에 대한 그의 연구는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맞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같은 특정 언어가 패권을 잡는 것에 반대해 당시 새로 만들어진 보편언어 ‘에스페란토’에 관심을 갖고 에스페란토어 보급 운동에 나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석주명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1950년 10월 6일 술취한 국군과 다툼에 휘말리는 바람에 42세라는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불의의 사고가 없었다면 해방된 새 나라에서 석주명은 어떤 성과를 남겼을지, 그가 꿈꾸었던 한국적 생물학이 어떤 모습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을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상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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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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