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 만나줘’에서 시작된 악몽···귀신보다 더 섬뜩하다[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3. 6. 10.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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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만나주냐며 여자를 죽인 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착취 당한 여성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차별과 혐오
‘인간을 위해’ 고통의 굴레를 진 동물들
그리고 인간을 혼쭐내는 ‘비인간 존재’들
···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7편의 단편들
약자 향한 인간의 잔혹함에 등골이 오싹
남성에 의한 교제 폭력 실루엣 사진. 이준헌 기자

한밤의 시간표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 | 260쪽 | 1만5800원

고양이는 왜 죽였어?

아이가 물었다. “고양이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이 아버지가 죽인 고양이는 죽은 친구의 아내가 기르던 것이다. 이 여자는 남자의 정부였다. 남자는 친구의 죽음 뒤 걱정이 돼 여자 집을 찾아갔다. “여자의 눈물, 여자의 외로움과 비탄과 달랠 길 없는 무기력한 고통”에서 “달콤하고 비뚤어진 음침한 즐거움”을 느꼈다. 서로 위로하고, 애도하다 같이 잤다. 남자는 “여자의 벗은 몸을 안고 친구와의 추억을 한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자는 남편 친구의 정부로 살 수 없었다. 여자가 관계 종료를 선언했을 때 남자는 처음 절망했다. 그 뒤에 격분했다. “왜 안 만나줘.” 여자를 목 졸라 죽였다. 정작 죽은 여자가 밤마다 만나러 왔을 때 남자는 기겁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망자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못이나 말뚝에 박아놓는다’는 조언을 찾았다. 살해 현장인 여자 집을 찾아갔다. 여자가 아끼던 녹색 눈의 고양이도 죽였다. 고양이 사체를 여자 시신이 누운 침대 머리맡 벽에 못 박아 매달았다.

곧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커가면서 목에 붉은 반점이 선명해졌다. “자신의 손가락이 여자의 목에 남긴 검붉은 자국”과 비슷했다. 그 아들이 어느 날 “고양이는 왜 죽였어, 아빠?”라고 물은 것이다.

연작 소설집 <한밤의 시간표>를 펴낸 소설가 정보라.ⓒ 혜영

정보라의 연작 소설집 <한밤의 시간표> 중 ‘고양이는 왜’의 내용 일부다. 신작 소설집은 ‘귀신 이야기’다. 귀신 들린 물건이나 동물을 모아놓은 연구소가 배경이다. 이 연구소엔 초자연 현상이 곧잘 나타난다. 벽은 부드러워졌다가 딱딱해진다. 계단이 사라지기도, 생기기도 한다. 야간경비원들이 “한밤의 시간표에 따라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복도를 돌며 반복적으로 잠긴 문들을 확인”한다. 연구소 지하 1층 주차장 계단 쪽엔 “한 층 올라가십시오”라고 말하는 ‘누군가’도 등장한다. 부부 사이에 누운 ‘흰옷을 입은 사람’도 말이다.

저 고양이가 지금 머무는 곳도 이 연구소다. 연구소의 ‘비인간 존재’는 저마다 사연을 지녔다. 소설은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나’가 ‘선배’와 ‘부소장’한테 들은 귀신과 귀신 들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에서 귀신이나 초자연, 초현실 현상보다 무서운 게 인간과 사회다. 정보라는 귀신 이야기에 지금 한국 현실 문제를 많이 끌어온다. ‘고양이는 왜’는 ‘교제폭력, 살인’ ‘스토킹’ 고발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 단편의 한 대목이다. “살인 자체는, ‘왜 안 만나줘’가 결부된 모든 사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혹은 그러하다고 수사 과정과 법정에서 우호적으로 결론 나듯이) 우발적이었다. ‘왜 안 만나줘’를 외치며 남자들은 자신의 소유라고 점찍은 여성의 집에 찾아가 흉기 난동을 벌이고(2021년 4월), 자신이 직접 만든 폭발물을 터뜨리기도 하고(2020년 10월) 혹은 피해 여성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살해하기도 한다(많다). ‘왜 안 만나줘’를 주장하는 남성의 여성 살해 역사는 유구하다.”

가부장제 사회에 속박된 여러 여성의 수난사도 등장한다. ‘부소장’은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네 개를 잃었다. 온라인 도박에 빠진 남편은 딸에게도 주먹질한다. 경찰에 붙잡혀갈 때 부소장에게 “남은 손가락 쓸 데도 없으니 다 잘라서 돈을 만들어오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부소장 사촌 언니도 아버지 빚을 평생 갚았다.

“집안의 모든 문제는 구정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떨어져서 그 집안 모든 사람에게 가장 만만한 존재 위에 고이고 쌓였다.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에 그 구정물을 감당하는 사람은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었다. 딸, 며느리, 엄마, 손녀,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느니 아들 가진 엄마는 길에서 손수레 끌다 죽는다느니 하는 말의 의미는 모두 같았다. 가장 만만한 구성원의 피와 골수를 빨아먹어야만 가족이라는 형태가 유지된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의 야간경비원 ‘숙’에 대해선 이렇게 서술한다. “ ‘청소 아줌마’에게는 아무도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아줌마’로 오래 살아온 숙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숙’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혼자 아이 셋을 키웠다. 병에 걸린 셋째 아이 병원비·수술비를 마련하려고, 낮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연구소에서 야간경비를 섰다.

공포와 관련된 이미지. 출처 언스플래시

이 단편 속 또 다른 야간경비원 ‘찬’은 성소수자다. 찬의 가족이 따르는 종교단체는 “자신들의 교리가 무작위로 정한 그 위계질서에 의거하여 차별과 혐오를 설파하기”를 좋아했다.

찬은 미성년자일 때 ‘탈동성애’ ‘치료’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 종교집단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폭력과 인권유린을 경험했다. “폭력과 학대를 견디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그렇게 계속 살고 싶지” 않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부정하기도 한다.

‘양의 침묵’의 양은 수의과대학의 실습 양이다. 인간들은 일부러 상처를 냈고, 의도적으로 질병을 감염시켰다. 그 질병이 나으면 다시 감염되고 상처 입었다. 양이 바란 것도 “무한히 반복되는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그저 잔디밭에서 풀이나 뜯고 멍하니 되새김질이나 하는 삶”이었다.

정보라는 고통받은 ‘비인간 존재’들을 인간을 벌하며 권선징악을 실천하는 해결사로 내세운다. 양은 강간 미수범을 모기만 한 크기로 줄여놓는다. 연구소에 위장취업한 괴기 심령 전문 방송 채널 유튜버를 혼쭐낸다. ‘손수건’에 수놓인 새들은 비틀리고 말라붙은 손을 가진 여자를 욕보이려는 음험하고 잔인한 남자와 또 잔학무도한 아버지를 습격해 주검으로 만든다. 이 손수건은 탐욕스러운 남자를 홀려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집에 실은 단편은 일곱 편이다. 귀신 들린 사물들과 동물들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정보라는 ‘작가의 말’에 “글이 나오지 않을 때 최후의 방책으로 나는 귀신 얘기를 쓴다. 어디서 귀신이 나오면 제일 무서울지 궁리하다 보면 어떻게든 글이 풀린다”고 썼다. “<한밤의 시간표>는 나에게 계약이나 마감의 굴레가 딸려 오는 일거리가 아니라 놀이동산 같은 작업이었다. … 쓰면서 정말 재미있었다”고도 했다. 독자들도 “읽으면서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귀신 이야기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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