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기시다 총리 장남 경질로 드러난 일본 세습정치 후진성

박성진 입력 2023. 6. 10.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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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제일 왼쪽) 일본 총리와 장남 쇼타로(왼쪽에서 세 번째) 전 총리 비서관 [교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도쿄=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일본에서는 여러 대에 걸쳐 내려오는 가업을 이어받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일이 흔하다.

오랜 기간 가업의 비법을 전수하며 많은 장인을 배출하는 면은 긍정적이지만,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단지 특정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물려받는 것은 개인에게 불행한 일일 뿐 아니라 사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장남인 기시다 쇼타로(32) 총리 정무비서관이 지난달 현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쇼타로는 작년 말 총리 공관(공저·公邸)에서 10여명의 친척을 불러 송년회를 열고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에서 신임 각료의 기념 촬영을 본뜬 듯한 사진을 찍어 물의를 빚었다.

이 계단은 작년 8월 개각 때 신임 각료가 단체로 연미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할 때도 이용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참석자 중 한명은 이 계단에 엎드려 누운 자세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공저는 총리 집무실이 있는 관저와는 다른 공간으로 총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지만, 기자회견도 하는 등 엄연히 공적인 공간이다.

쇼타로가 공저에서 사적인 행사를 즐기는 등 부적절한 행위가 한 주간지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쇼타로 비서관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했다며 경질해야 한다는 주장이 야당 등에서 나왔지만 기시다 총리는 '엄중 주의'를 주는 데 그쳤다.

쇼타로는 기시다 총리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작년 10월 총리 비서관이 됐다.

게이오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인 미쓰이물산에서 근무한 뒤 2020년부터 기시다 총리의 의원 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다가 지난해 총리 정무비서관에 기용됐다.

기시다 총리가 총리를 제일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총리 비서관에 장남을 기용하자 당시 야당에서는 "세습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시대착오가 아닌가"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도 그럴 것이 정무비서관은 총리의 일정을 최종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총리의 지시를 받아 정권의 주요 정책과 정부 각 부문의 조정도 담당하는 핵심 요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시다 총리가 쇼타로를 정무비서관으로 기용한 것은 그에게 정치 경험을 쌓도록 해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키우려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쇼타로가 만약 총리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 경력으로 30대 초반의 나이에 총리 비서관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쉽게 된 총리 비서관이라는 자리의 무거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인 듯 쇼타로는 총리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저에서 사적 모임을 열고 마음대로 기념 촬영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7일 총리 공저에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 [교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쇼타로의 부적절한 행동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1월에도 기시다 총리의 유럽·북미 출장에 동행해 관광과 쇼핑 목적으로 관용차를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그가 총리의 기념품 구매를 위해 관용차를 썼으며 "개인적인 관광을 위한 행동은 전혀 없었다"면서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거듭된 논란에 세습 정치인을 보는 일본 국민의 시선은 따가워졌다.

기시다 총리가 엄중 주의를 준 뒤에도 아사히신문이 지난달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쇼타로 비서관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고 답한 응답자가 76%에 달하는 등 비판이 이어졌다.

결국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29일 "공적 공간인 공저에서의 행동이 정무비서관으로서 부적절해 교체하기로 했다"며 "당연히 임명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말하며 사실상 경질했다.

이제 잠시 경로를 이탈했지만, 쇼타로의 인생 행로는 아버지인 기시다 총리가 걸어온 길과 많은 부분 겹쳐 있다.

기시다 총리도 유력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난 3대 세습 정치인이다.

할아버지가 중의원(하원) 6선 의원이었으며, 아버지는 중의원 의원과 중소기업청 장관을 지냈다.

아버지인 기시다 후미타케 중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기시다 총리는 아버지의 지역구인 히로시마현 제1구를 물려받아 내리 중의원 10선을 했다.

부모에 이어 자녀가 정치인이 되는 것을 무턱대고 세습정치라며 나쁜 일로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단지 유력 정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남들은 비상하게 노력해도 닿기 어려운 국회의원과 장관 자리를 손쉽게 차지하는 일본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

sungjin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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