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취향 바꿔줄게”...같은 남자를 좋아한 대가는 가혹했다 [박민기의 월드버스]

박민기 기자(mkp@mk.co.kr) 2023. 6. 10.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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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1967년 동성애처벌법 폐지 결정
이후에도 차별은 30년 넘게 이어져
동성애 군인들 상대로 전기충격 자행
강제전역 조치에 극단적 선택 사례도
‘수낵 現총리 공식사과’ 목소리 높아져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사진 출처 = 영국국방저널]
불과 40여년 전만 해도 동성애는 치료받아야 할 정신병으로 분류됐습니다. 동성애를 향한 차별은 당연시됐습니다. 정신건강 증진 등을 도모하는 미국 비영리단체 ‘멘탈 헬스 아메리카’가 내놓은 1998년 조사 결과 미국 학생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욕설이나 비하 단어를 하루 평균 26번 듣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니다. 독일 나치는 동성애를 전염병으로 치부해 동성애자들을 색출했고, 아프리카 우간다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에도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의회를 통과한 ‘동성애 금지법’에 최종 서명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90년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지 30여년이 흘렀지만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2013년 7월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영국도 과거에는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들에게 엄격하고 보수적인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영국 정부가 과거 동성애 군인들에게 전기 고문을 강행했다는 보고서가 최근 발견되면서 영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블룸버그가 입수한 ‘영국 군대의 동성에 혐오에 대한 역사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동성애 성향의 영국 군인들은 ‘치료 명목’으로 전기 충격 치료를 강제로 받아야 했습니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영국 군인들은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까지 의사들로부터 성적 취향을 바꾸기 위한 치료를 강요받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연구 결과에는 1967~2000년 영국 정부 주도 아래 동성애 군인들 상대로 전기 충격, 협박, 성추행 등이 자행됐다는 익명의 진술 1000건 이상이 포함됐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 괴롭힘 등으로 전·현직 군인들이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강제 전역 조치를 당한 충격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노숙 생활을 전전하는 경우도 파악됐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정부 뜻에 따라 강제로 군복을 벗으면서 연금 대상자 명단에서도 제외됐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들에 대한 보상금이 최대 6200만달러(약 823억 원)까지 책정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은 블룸버그와의 익명 인터뷰에서 “나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보내졌고, 그들은 내 머리에 전극을 부착했다”며 “이후 여자 사진을 보여주면서 뇌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영국 공군에서 근무했던 다른 익명 피해자는 “의료진이 뇌 신호를 분석한 뒤 뇌에 그림자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며 “뇌 사진 속 그림자로 얼룩진 부분이 잘못된 성적 취향의 원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1월 상인들과 만나 악수하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로이터 = 연합뉴스]
이번 보고서의 존재는 ‘자유로운 성적 취향’을 보장하기로 합의한 영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영국 정부는 1967년 동성애 처벌법을 폐지했지만, 이후에도 게이·레즈비언·트렌스젠더 등 수천 명의 성소수자들이 30년 넘는 시간 동안 차별과 피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회의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로 번졌고, 결국 리시 수낵 영국 총리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상황까지 치달았습니다. 동시에 이들 피해자들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당시 동성애 군인들에 대한 이 같은 대우가 수낵 총리 지시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현재 영국 국민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있는 현직 총리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마땅히 사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아직 수낵 총리의 공식 사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 대변인은 “조사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적절한 시기에 대응할 것”이라며 수낵 총리가 일각의 공식 사과 권고를 받아들일지 여부에 대해서는 일축했습니다. 영국 국방부는 관련 조사 결과가 장관에게 보고됐다면서도 공식 입장을 밝히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대변인은 “성소수자 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봉사를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영국에서 과거 정부의 실수나 잘못된 정책에 대해 현직 총리 등 국가수반이 책임을 통감하며 공식 사과하는 일이 흔한 사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1972년 1월 30일 영국군 공수부대가 평화시위를 벌이던 북아일랜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4명을 숨지게 한 ‘피의 일요일 사태’에 대해 자신의 총리 재직 중인 2010년 공식 사과했습니다. 사태 발생 약 40년 만입니다.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수학 천재 앨런 튜링에 대한 부당한 처우가 내려진 정부 조치에 사과했습니다.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20살 연하의 남성과 연애하다 발각돼 영국 법원으로부터 화학적 거세를 선고받았고, 정부 역시 이후 그의 연구직을 박탈했습니다. 튜링은 결국 화학적 거세를 받고 2년 뒤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이번 조사를 주도한 테렌스 이더튼 영국 상원의원은 “육·해·공군 수장들이 성소수자 군인들에게 개별 사과문을 보내고 박탈된 이들의 군 계급을 복구시켜야 한다”며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 받은 그들의 훈장도 모두 공식 인정돼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한때 국가를 위해 총칼을 빼들었던 피해 군인들의 용기에 수낵 총리가 공식 사죄로 화답할 수 있을지 영국 사회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매일 쫓기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알면 알수록 더 좋은 국제사회 소식.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 주의 가장 핫한 이슈만 골라 전해드립니다. 단 5분 투자로 그 주의 대화를 주도하는 ‘인싸’가 될 수 있습니다. 읽기만 하세요. 정리는 제가 해드릴게요. 박민기의 월드버스(World+Univers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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