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서평 유레카] 우연이 만든 발명품 ‘언어’… AI는 인간의 언어를 이길 수 없다
진화하는 언어ㅣ닉 채터, 모텐 크리스티안센 지음ㅣ448쪽ㅣ2만4000원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언어를 프로메테우스의 불에 비유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로 묘사된다. 인간은 신들의 보호 아래 위험한 야생에서도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우스의 미움을 산 인간들은 ‘불’을 뺏기고 굶주림과 위험을 마주한다. 이를 보다 못한 프로메테우스는 다른 신들 모르게 인간에게 불을 몰래 되돌려줬고 이를 들킨 이후에는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게 된다.
신화 속에서 불은 나약한 인간이 대자연의 위협을 벗어나고 문명을 이룰 수 있도록 한 신의 선물로 그려진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리처드 도킨스는 현실 세계의 불은 언어라고 설명한다. 언어가 있었기에 인간이 문명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언어는 흔히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언어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현재는 인류의 조상이 진화를 통해 정확한 발음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서 언어가 만들어졌고 체계적인 문법을 통해 진화했다는 주장이 가장 널리 받아 들여진다.
두 명의 인지과학자 닉 채터와 모텐 크리스티안센은 그들의 저서 ‘진화하는 언어’에서 “언어는 결코 진화의 산물이 아니며 그저 우연이 쌓이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언어가 유전자나 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독창성이 수천년 축적되면서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1769년 영국 군함 인데버호는 천문 관측을 위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폴리네시아 제도로 가던 중 대서양의 한 섬에 정박했다. 이 섬에서 오랜 시간 항해를 해야 하는 만큼 식량과 물, 땡감 같은 비축 물자를 보충하려던 참이었다. 물을 찾아 헤매던 선원들은 섬의 원주민들과 우연히 마주했다. 원주민과 소통을 시도했던 선원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자칫하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선원들은 말 대신 몸짓을 이용해 소통을 시도했다. 수십명의 선원 중 단 두명만이 앞으로 나섰다. 손에는 무기를 들지도 않았고 몸을 긴장시키지도 않았다. 선원들의 의도가 전해졌을까. 원주민들도 들고 있던 무기를 옆으로 내팽개치며 선원들을 맞이했다. 서로의 언어를 모르더라도 즉흥적으로 서로에게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낸 셈이다.
저자들은 실제 역사 속 사건과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분석해 언어가 인데버호의 사례처럼 ‘제스처 게임’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몸짓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고 상대방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제스처 게임이다. 마치 우연한 사건으로 영국 군인과 외딴섬의 원주민이 만나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맨손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아무 의미 없는 발음을 연결하면 쉽게 언어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수백만년 동안 제스처 게임으로 언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언어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진화를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만약 언어가 사라진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인류 문명도 한순간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생존과 발전이 언어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오히려 언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과 언어는 공생 관계에 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언어를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살아남기 위해 인간에게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인간의 진화로 언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들어진 언어가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전 세계는 새로운 대규모 언어 모델(LLM) 인공지능(AI)인 챗GPT의 등장에 주목했다. 챗GPT는 마치 사람처럼 문장을 이해하고 만들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보다 더 사람 같기도 하다. 이렇다 보니 AI 기술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자들은 적어도 언어를 다루는 능력에서만큼은 AI가 인간을 절대 뛰어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가진 창의력으로 언어를 만들었고 인간을 위해 언어가 진화해 온 만큼 언어의 본질은 인간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AI의 능력이 인간을 뛰어넘는 특이점이 오는 날, 언어만이 인간의 정체성과 능력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들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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