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식 “힘없는 부처? 국가보훈부에 대한민국 사활 걸려 있다”

이옥진 기자 2023. 6. 1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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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월남 참전 영웅의 아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銘碑)에는 베트남전 참전 영웅 박순유 육군 중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만난 그의 아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보훈은 과거의 헌신에 대한 보상을 넘어 대한민국의 정신적 근간이자 미래를 견인하는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년 박민식에게 아버지 박순유 중령은 양가적 존재였다. 박 중령은 1972년 6월 베트남전에서 전사했다. 그의 넷째 아들 박민식은 당시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너는 군인의 아들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달랐다. 대놓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쉬쉬하며 “불쌍한 아이”라고 동정하곤 했다. 학교에서 “원호 대상자 손 들어봐라” 할 때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에 장래 희망으로 언제나 ‘군인’을 적었지만, 가슴 한쪽엔 부끄럽고 찜찜한 감정이 웅크리고 있었다.

부친의 작고로부터 꼭 51년이 흐른 올해, 박민식은 우리나라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이 됐다. 지난 5일 공식 출범한 국가보훈부는 1961년 설립된 군사원호청에서부터 출발했다. 1985년 ‘국가보훈처’로 개칭됐다. 돕고 보살핀다는 시혜적 의미의 ‘원호(援護)’에서 받들고 예우한다는 의미의 ‘보훈(報勳)’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기관의 위상은 장관급과 차관급을 수차례 오가며 부침을 겪었다. 박민식의 취임 일성은 이랬다.

“역대 어느 정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국가보훈부 출범을 우리가 이뤄냈다.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인 ‘일류 보훈’의 엄중한 소명을 분골쇄신의 자세로 책임 있게 완수하겠다.”

지난 2일 서울 용산에 있는 서울지방보훈청 그의 집무실 책상 뒤에는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라는 글귀가 크게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진한 부산 사투리 억양의 그는 열정이 넘쳐 보였다. 예컨대 이런 말. “내 모든 관심과 에너지가 국가 보훈에 필(feel)이 꽂혀 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는데, 그때부터 머리 싸매고 보훈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한다. 솔직히 검사, 국회의원 할 땐 안 이랬다(웃음).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국가보훈부가 가장 중요한 부처라고 생각한다.”

전몰·순직군경의 남겨진 어린 자녀를 지원하는 보훈부의 ‘히어로즈 패밀리 프로그램’에 대해 묻자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듯이. “내가 뭘 잘못했나? 나라가 나한테 미안해 해야지. 나라가 불러서 (아버지가) 전사를 했지 않나. 영웅의 아이들에겐 온 국가가 나서서 은혜를 갚아도 모자란다. 내가 절절하게 느꼈던 아픔을 이젠 누구도 겪지 말아야 한다.”

지난 3월 경기 용인시 88컨트리클럽에서 열린 히어로즈 패밀리 멘토-멘티 결연식에서 박민식 장관이 최의영 학생에게 히어로즈 패밀리 증서를 수여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천안함 전사자 고(故) 최정환 상사의 딸인 의영양은 2021·2022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상금왕이자 다승왕인 박민지 선수와 결연을 맺었다.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진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국가보훈부로의 승격, 어떤 의미인가.

“국격에는 경제력, 국방력 등 눈에 보이는 힘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가치도 중요하다. 국격은 나라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보훈부 승격의 가장 큰 의미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국가가 제대로, 끝까지 책임지고 예우한다는 확고한 인식을 심어주는 데 있다. 이번 승격으로 대한민국이 진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본다.”

-승격되자마자 정부 19부 중 의전서열 9번째가 됐다.

“행정안전부 다음이다. 다른 장관들이 ‘순서대로 꼴찌로 들어와야지’라며 농담하더라, 하하. 윤석열 정부가 보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반영된 것이다.”

-1년간 보훈처를 이끌며 어떤 일들을 했나.

“과거 정부에서 ‘제복 입은 사람들’을 존중한다기보다는, 그들을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 청와대 행정관이 부르면 별 4개 달린 장성이 뛰어간다든지, 시위꾼들이 경찰관들을 내동댕이친다든지…. 나는 국민들이 제복을 우리나라를 지키는 영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길 바라왔다. ‘히어로즈 패밀리 프로그램’은 내 어린 시절의 아픔에서 출발했다. 작년 기준 전국의 전몰·순직군경 가구 중 미성년 자녀가 있는 집이 128가구, 189명이다. 이 아이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줘야 하는 것 아닌가. 물질적 지원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보살펴야 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웅의 아이들이라면 마을이 아니라 온 나라가 나서도 미안한 일이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한미 참전 용사 10대 영웅’ 홍보 영상을 미국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대형 전광판을 통해 상영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 한미연합군사령부와 공동으로 선정한 10대 영웅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밴 플리트 부자(父子),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백선엽 육군 대장 등이 이름을 올렸는데, 30초 길이의 영상에는 이들의 사진을 보여준 뒤 이런 메시지가 뜬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 평화는 먼 곳에서 온 참전 용사들의 희생 덕분이다. 한국전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겠다.” 백선엽 장군의 장녀 백남희 여사는 이 영상을 보고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박민식 장관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의 딸 백남희 여사와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송출 영상을 보는 모습. /국가보훈처

-‘보훈은 단순한 추모에 그쳐선 안 된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보훈’을 국립묘지 가서 머리 숙이는, 제사 같은 걸로 생각한다. 나도 과거에 그랬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장관이 왜 필요한가. 보훈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에 있는 게 아니라 미래에 있다. 나라가 잘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이 필요한가? 반도체, 자동차 만드는 건 두 번째다.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 나라에 대한 자긍심, 애국심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을 하는 곳이 보훈부다.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요즘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엄숙주의에 갇힌 옛날 방식을 버리고 젊은 세대와 호흡하는 방향으로 갈 생각이다.”

-예를 든다면?

“미국 워싱턴DC에서 현지인들, 관광객들은 내셔널몰, 알링턴국립묘지를 많이 찾는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돼야 한다. 가족이 주말에 손잡고 서울현충원에 나들이 가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구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용산에 호국보훈공원을 조성해 세계적 명소로 만들고, 서울현충원은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통해 자유대한민국의 상징 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한 곳으로 만들겠다.”

◇“보훈에는 진영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

지난달 22일 열린 박민식 장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의 가장 큰 쟁점은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 사업이었다. “내란죄의 수괴,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기념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고 한 진보당 강성희 의원에게 박민식은 “이승만 대통령을 내란 목적 살인죄의 수괴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라고 맞섰다.

-이승만 기념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주변에서 (청문회 때) ‘로키(저자세)로 임하라’고 해서, 욱하는 성격을 참느라 혼났다. 참 답답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過)도 있지만, 독립에서 건국까지의 공(功)이 큰 인물이다. 오늘날 자유민주국가의 토대를 만든 분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진영 논리로 그의 공을 폄훼하는 이들이 있다.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우리나라의 정체성, 방향성과 직결된 문제다. 국민이 똑바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가 적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는, 분단 상황이란 걸 잊어선 안 된다.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싸움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내겐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바로잡아야 할 책무가 있다.”

-이화장, 배재학당 등이 이승만 기념관 후보지로 거론된다.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과거 박정희 기념관, 김대중 기념관 등의 사례를 보면 평균 12년 정도 걸렸다. 질질 끌게 되면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이다.”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박민식은 “보훈은 국민 통합의 도구여야지, 정쟁의 수단으로 쓰여선 안 된다”고 했다. “보훈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신을 바친 독립운동가, 공산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호국 용사, 자유민주주의를 세운 민주 열사까지 조국을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같은 애국자다. 보훈부는 어느 하나 소홀함 없이 균형 있게 예우하고 보답하고 지원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보훈을 유달리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된 나라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역사를 기억하고 예우하고 계승해야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윤 대통령 개인에 대해선 나도 깜짝깜짝 놀란다. 그에겐 누구도 못 말리는 철학이 있다. 국방과 보훈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자기 청춘과 일생을 바친 사람을 나라가 외면하면, 누가 다음에 자기 목숨을 걸고 전선에 나서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윤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였나.

“2006년 서울지검 특수1부에 있을 때 사표를 썼는데, 윤 대통령이 검찰청 앞 중국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 그때 나는 (윤 대통령) 이름만 알 때다. 자기도 사표 써봤는데 바깥 생활이 안 맞더라면서, 검찰에 남아 있으라고 하더라. 잘 모르는 후배에게 이렇게 마음을 써준다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뜬금없기는 했다, 하하.”

윤석열 대통령이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 뒤 베트남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박민식 장관 어머니 김순용 여사에게 인사하는 모습. /대통령실

-의원 시절이던 2013년, ‘윤석열은 제가 아는 한 최고의 검사’라는 소신발언을 했다(당시 윤 대통령은 국정원 대선개입 검찰 수뇌부 외압 의혹을 폭로해 여당 지도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당에서 윤 대통령을 소영웅주의자로 몰던 때다. 친정집(검찰)이 시끄러우니 마음이 편치 않아 한마디 한 것이다.”

-가까운 사이라서 당신에게 보훈부를 맡긴 건가.

“전혀. 가깝다고 할 수도 없는 데다, 윤 대통령은 친소를 따져 자리를 주는 사람이 아니다. 인사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특수부 검사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일 잘하는 놈이 장땡이다. 일을 못하면 아무리 가까워도 안 맡긴다. 내 경우는 선친이 전사자라는 점을 고려한 게 아닐까 싶다.”

-대통령 부부가 보훈 관련 일정을 많이 소화하고 있다. 가까이서 본 윤 대통령, 김건희 여사는 어떤 사람인가.

“감동을 많이 받았다. 3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윤 대통령이 전몰장병 5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지 않았나. 누가 윤석열 정부의 보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장면을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이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대통령이 부른 게 참 의미 있는 일이었다. 윤 대통령은 업무에 있어서는 치밀하고 꼼꼼하다. 김 여사는 털털하고 진솔한 분 같다.”

-김 여사가 히어로즈 패밀리 프로그램 출범식에 참석했을 때 ‘발버둥 치는 아이를 억지로 안았다’는 비난이 나왔는데.

“보훈을 진영 싸움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단적인 예다. 그 아이는 2020년 한강 투신실종자 수색 중 순직한 유재국 경위의 아들 이현군이다. 유 경위가 사망한 지 두 달 뒤에 태어난 이현군은 뇌성마비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당시 김 여사가 ‘안아봐도 되겠냐’고 아이 어머니에게 묻고 안았다. 아이가 김 여사와 눈을 마주치고 활짝 웃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이 나온 거다. 우리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가족을 지키는 일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게 주어진 일임을 무겁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4월 13일 2020년 한강 투신 실종자 잠수 수색 중 순직한 고(故)유재국 경위 자택을 방문해 유 경위의 아내 이꽃님씨와 대화하는 모습. 당시 김 여사가 유 경위와 이씨의 아들을 안았는데, '억지로 안았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대통령실

◇‘원호대상’ 소년, 국가보훈부 장관이 되다

박민식의 부친 박순유 육군 중령은 주로 첩보부대(현 국군정보사령부)에서 근무한 정보장교였다. 1972년 맹호부대의 첩보부대장(공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해 6월 베트남 빈딘성 지역에서 적군의 습격을 받아 산화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면.

“어릴 적 경남 거창의 시골에 살았다. 장교인 우리 아버지가 우리 마을의 ‘호프(hope)’였다. 아버지가 선물을 보내오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 자랑스러웠다. 아버지가 벌을 줄 때 집 앞 감나무 아래 서 있으라고 한 것도 기억 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가 서른여섯이었다. 이장님이 아버지 전사 통지서를 갖고 왔다. 노란 종이에 ‘박순유 사망’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어머니가 너무 놀라 쓰러지셨다. 외삼촌이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갔고, 시장에 농작물을 내다 팔면서 ‘월남때기’라 불리며 홀로 6남매를 키웠다. 그때야 다들 가난했지만, 방 두 칸짜리 슬래브집에서 우리 7식구가 살았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엄마다. 부산말로 ‘뻣나가지 않도록’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생각 하나로 사셨던 것 같다.”

박민식 가족은 베트남에서 장학사업을 하고 도서관을 설립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강력하게 원해 시작한 일이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를 ‘학살자’로 매도하는 이들이 있다. 핀셋으로 전쟁의 어느 한 장면을 뽑아내 평가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다. 전쟁을 가해자와 피해자, 이분법적으로 나눠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왔고 외무고시(1988), 사법시험(1993)을 둘 다 패스했다.

“한 번도 신동, 천재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집중력은 좋았던 것 같다. 사시 공부할 때,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는 확 놀았다. 이러면 일요일부터 절박해진다. ‘하루를 완전히 놀았으니, 나머지 6일은 공부를 해야겠구나’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스타카토식으로 공부를 한 셈이다.”

-운전면허를 16번 떨어진 건 실화인가.

“미국에서 한 번 더 낙방해 17번이다. 웃을 일이 아니고, 참 심각했다. 다섯 번쯤 떨어지니까 주눅이 들더라. 검사 시절에 시험을 보는데 20대 순경이 감독관으로 왔다. 도로주행을 내 딴엔 거의 완벽하게 했다고 앉아 있는데, 순경이 말하더라. ‘아저씨! 한 번 더 오세요!’ 사시가 2년 걸렸는데, 운전면허가 3년 반 걸렸다(웃음).”

-외교관과 검사는 왜 그만뒀나. 특히 검사 시절엔 ‘불도저 검사’로 잘나갔는데.

“원래 군인이 꿈이었는데, 외교관을 ‘세계 무대에서 싸우는 평시의 군인’이라고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집안 형편도 좋고 세련된 사람이 외교관을 하는 분위기였다. 스타일이 안 맞아서 고민하다 사표를 썼다. 검사는 아주 보람 있게 했다. 그런데 참 시끄러운 사건을 많이 맡았다. 국정원장, 판·검사들을 구속시키느라 감정 소모가 많았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8·19대 재선 의원을 지냈다. 정치에 입문한 이유는.

“당시에 일이 다 안 풀렸다. 변호사 1년 했는데 손님이 딱 끊겼고, 대형로펌, 로스쿨, 청와대 등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다 안 됐다. 그러던 차에 부산에서 출마를 권유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내가 ‘(정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사양하자, 어떤 분이 말하더라. ‘이 양반아, 정치는 고시 공부와 다르다.’ 당시에 친이든 친박이든 줄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계파도 없이 국회의원이 됐다. 의원 생활 동안 보훈에 대한 관심은 꾸준했다. 국가유공자와 제대군인을 지원하는 법안도 여럿 발의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이 나라가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가?’는 대정부질문 때 내 단골 멘트였다.”

-청문회에서 내년 총선 출마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왜 답을 제대로 못했나.

“출마는 당사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니즈(수요)가 더 중요하다. 그걸 모르고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여러 번 떨어지지 않았나(웃음).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를 불러줄 때가 따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머릿속에 보훈 생각밖에 없다.”

어떤 장관으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보훈부는 돈도 칼도 없는, 어찌 보면 힘없는 부처다. 하지만 나라의 사활이 걸려 있는, 어느 곳보다 중요한 부처라는 걸 매 순간 느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라고 비하한다. 나의 소명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젊은 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정말 자랑스러운 나라, 자부심을 느껴도 될 만한 나라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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