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대학 평준화의 두 가지 의미

기자 2023. 6.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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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육이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0년대 초부터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교육시스템으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TV 프로그램 및 언론 기사들을 통해 앞다퉈 소개되었다. 특히 진보교육감들의 등장과 맞물리면서 ‘경쟁 없는 교육’의 좋은 사례로 선전되었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그러나 핀란드 교육은 결코 ‘롤모델’이 되지 못했다. 그저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핀란드 교육은 한국 교육계의 통념과 상충하는 요소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대입제도를 설명해주면 경악하는 사람들이 많다. 첫째, 핀란드는 대입에서 내신을 반영하지 않는다. ‘내신 성적을 반영해야 공교육이 정상화된다’는 주장의 반례다. 둘째, 핀란드 대학들은 대입시험을 통해 학과별 지원자를 한 줄로 세워 선발한다. ‘한 줄 세우기가 경쟁과 획일화를 유발한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셋째, 핀란드는 성적순으로 합격자를 가려낸다. 성적순 선발의 비교육적 측면을 부각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강조하는 미국식 담론의 대척점에 있다.

핀란드의 대학은 지원자를 한 줄로 세워 성적순으로 선발을 한다. 그런데도 왜 핀란드에서는 대입경쟁이 과열되지 않는가? 대학들의 수준이 고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들에서 제공하는 ‘교육의 질’이 비교적 고르다. 물론 대학들 사이에서 ‘서열’을 매길 수는 있다. 대학들이 서로 완벽하게 동일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대학들 사이의 ‘편차’는 적다. 그러니 핀란드 학생들로서는 특정한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한국에 대학평준화의 전형으로 알려진 나라는 프랑스였다.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 대입제도가 개혁되었는데, 그 이전에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프랑스의 전통적 대입제도는 전 세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대입시험(바칼로레아)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으면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나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주지에서 너무 먼 대학은 지원이 제한되며, 특정 대학에 너무 많이 몰리면 추첨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선발(selection), 즉 대학이 입학자를 골라내는 과정이 없다는 특성이 있었다.

프랑스와 핀란드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의 일부 학과는 프랑스처럼 일정 성적 이상만 되면 입학시키지만, 정원제한(numerus clausus)이라고 불리는 일부 학과는 핀란드처럼 성적이 높은 지원자를 선발한다. 특정 학과가 선발 학과인지 비선발 학과인지는 대학마다 다르지만 의학, 수의학, 심리학, 경제학과 같은 최고 인기 학과들은 예외 없이 정원제한을 두고 선발한다. 선발 기준은 일부는 아비투어 성적순(내신과 공인시험 2 대 1로 합산), 일부는 대학 자율인데 대학 자율의 경우라 해도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 이 밖에 ‘대기자 입학’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어 성적 미달로 입학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대기자로 등록하고 몇년간 기다리면 입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인원은 정원의 20% 정도로 국한된다. 대학에 재학하면서 대기자로 등록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주로 취업했거나 직업교육을 이수 중인 사람들이 활용한다.

핀란드가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제도를 택하지 않고 모든 학과에서 성적순으로 선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나 독일 제도에 나름의 상당한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중도탈락률이 높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1학년 때 절반 이상이 진급에 실패하고, 의학과는 중도탈락률이 무려 80%가 넘는 경우도 있다. 독일에서도 문과계통 학과의 중도탈락률은 10~20%대이지만 이공계열 학과의 중도탈락률은 40~50%대에 달한다.

평준화와 관련된 논의가 종종 미궁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준화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교육품질’의 평준화와 ‘입학제도’의 평준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프랑스, 독일, 핀란드는 모두 교육품질의 평준화를 이뤘다. 하지만 입학제도는 프랑스와 핀란드가 전혀 다르고, 독일은 그 중간쯤에 해당한다.

한국의 대학평준화 담론과 정책은 입학제도 평준화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품질 평준화다. 설령 입학제도의 평준화를 이루는 것이 목표라 할지라도, 교육품질의 평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품질 평준화를 위해 대학 재정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한국 진보교육계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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