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처럼 밀도 있고, 태양처럼 풍요롭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3. 6.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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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피자

나폴리 중앙역 쇼핑몰에는 문 닫은 가게가 절반이었다. 이탈리아의 건국 영웅 가리발디 장군의 이름을 딴 역 앞 광장 주변에는 싸구려 장신구를 파는 노점상만 가득했다. 기차에서 내린 한 줌의 관광객은 붉은 벽돌로 뒤덮인 좁은 거리로 빠져나갔다. 낡은 건물과 지저분한 거리, 무표정한 사람들이 만든 살벌한 풍경에 긴장감이 돌았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 있는 ‘나폴리3657’의 마르게리타 피자.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10분 넘게 걸었을 때 사람들이 하얀 피자 박스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피자집 중 ‘다미켈레(da Michele)’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였다. 평일 때늦은 시간이라 줄은 길지 않았다. 1870년부터 영업을 했다는 이곳은 허름한 동네 국밥집 같은 느낌이었다. 주문하자마자 나온 피자는 생각보다 컸다. 알다시피 이탈리아는 기본적으로 1인 1피자가 원칙이다. 국밥 이야기를 계속 해서 미안하지만 국밥 한 그릇을 두 사람이 나눠 먹지 않는 것과 같다.

섭씨 400도가 넘는 화덕에서 장작불로 익혀낸 피자는 군데군데 표범 가죽 무늬처럼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마르게리타 피자의 토핑은 토마토 소스, 모차렐라 치즈, 바질이 전부였다. 본래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음식이었던 피자의 원형이었다. 그 가난이 만들어낸 절제된 맛의 풍경은 오히려 집중도를 높여줬다. 밀가루, 토마토, 치즈, 그리고 피자 오븐의 뜨거운 열기가 이뤄낸 맛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1800년대 후반 나폴리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대서양과 접한 도시들, 즉 뉴욕과 보스턴 같은 미국 동부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피자집이 뉴욕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 ‘대부’의 마피아가 뉴욕에서 활약한 것 역시 필연이었다. 피자와 토마토 파스타 같은 이탈리아 남부 요리가 세계에 퍼진 것 역시 이때가 시작이다. 미국의 풍요로움을 만난 피자는 갖은 토핑을 올렸다. 마침내 열대 과일인 파인애플도 토핑으로 올라갔는데 여전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 ‘하와이안 피자’를 고약한 농담처럼 여긴다. 토핑의 자유와 다양성이야말로 피자가 세계로 퍼져나간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맛의 골조만 남긴 그 ‘원조’ 스타일의 매력은 여전하다. 그 매력을 한국에서 맛보기 위해 간 곳은 강동구 성내동의 ‘나폴리3657′이었다. 강동역 3번 출구 근처 대로변은 피자집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강남 번화가도 아니었고 사람이 붐비는 대학가도 아니었다. 또 피자 오븐 모양을 띤 단독 건물에 들어선 이 집만 보자면 어느 남부 유럽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실내에 들어서니 넓게 트인 주방과 피자 오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맞은편 홀에는 회사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백반집에 온 것처럼 각자 피자 한판을 앞에 두고 먹었다. 피자 종류는 세 가지뿐이었다. 파스타 같은 다른 메뉴는 아예 없었다.

하얀 조리복을 입은 주인장은 아기 엉덩이처럼 토실한 반죽을 손으로 얇게 펴더니 빠르게 오븐에 집어넣었다. 피자가 익는 데 걸린 시간은 2분 남짓. 그리고 피자는 머뭇거림 없이 바로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피자를 한 입 먹었을 때 도전적인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배달 피자의 애매모호한 온기가 아니었다. 오븐에서 갓 나온 피자는 마치 심장이 뛰는 어떤 생명처럼 생동하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얇게 편 피자 도우는 애시당초 많은 맛을 짊어질 수 없었다.

가장 기본인 ‘마르게리따’는 토마토의 달고 신 맛, 모차렐라 치즈의 고소함, 바질의 싱그러움이 겹치지 않고 각각의 영역에서 밝게 빛났다. 고르곤졸라, 폰티나, 에멘탈, 모차렐라 네 가지 치즈를 올린 ‘꽈뜨로포르마지’는 고소한 치즈의 맛이 고온의 열기 속에 부풀어 올랐다. 따로 준비된 꿀을 뿌려 먹으니 달콤한 디저트 같기도 했다. 마르게리타 피자에 매콤한 햄의 일종인 초리소를 올린 ‘디아볼라’는 방심한 사이 매운맛이 기습적으로 다가왔다. 담백한 도우는 이 모든 맛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피자를 넣고 빼는 주인장의 모습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본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입은 바삭한 셔츠 자락 같은 피자 도우와 지중해 태양 아래 졸여지듯 익은 토마토의 단맛을 배경으로 펼쳐진 피자의 맛은 풍요롭고 호화롭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하고 충분했다.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이 피자를 먹는 내내 나는 한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완벽한 피자를 위해 무한히 많은 토핑이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완전하기 위해 모든 것이 필요한가? 아니다. 이 집 피자는 그 단순하고 오래된 지혜를 식지 않는 열기로 웅변할 뿐이었다.

#마르게리따 2만2000원, 디아볼라 2만6000원, 꽈뜨로포르마지 2만6000원, (02)-477-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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