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건국 자금을 제공했나?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2023. 6.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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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총독부 2000만엔 제공설
일러스트=한상엽

8월 15일 오전 8시, 여운형은 총독부 2인자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를 찾았다. 니시히로 경무국장이 배석한 가운데 엔도는 여운형에게 종전 후 치안 유지를 요청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경제범 석방, 식량 확보, 독립 활동 보장 등 5개 조건을 요구했고, 엔도는 이를 수락했다. 1년 전인 1944년 8월부터 여운형은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건국동맹’(건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각인각파(各人各派)의 대동단결’을 추구하는 온건한 좌파였다.

여운형과 접촉에 앞서, 총독부는 송진우에게 치안 유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일본이 후퇴했으면 했지, 우리 한인이 일본으로부터 어떤 지시나 부탁을 받을 성질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총독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일왕의 항복 방송 이후,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두 차례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송진우가 거부하자, 여운형은 직접 그를 찾았다. ‘삼고초려’한 여운형에게 송진우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호통쳤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건국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총독부의 부탁을 받고 일본인을 위해 치안을 대행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 여운형의 집 근처 계동 2층 양옥집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었고, 중도좌파 여운형이 위원장, ‘순정(純正) 우익’ 안재홍이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튿날 오후, 휘문고보 교정에서 여운형의 연설이 있었고, 곧이어 휘문고보 강당에서 무도(武道)계 인사, 체육인, 중등학교 체육 교사, 학생 등 2000여 명으로 조직된 건국치안대 결성식이 열렸다. 치안대 대장 장권은 YMCA 유도부 사범이었다.

건준과 치안대는 국민적 지지 속에 급속히 조직을 늘려나갔다. 불과 2주 만에 전국적으로 145개소 이상의 건준 지부, 162개소 이상의 지방치안대가 조직되었다. “계동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연일연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 새벽부터 문화·정치·사상·경제·교육 각계의 저명인사가 잇달아 드나든다. 신문기자반·사진반·영화촬영반·방송반 등의 자동차 오토바이가 그칠 새 없이 들이닫는다. 이웃 어느 부인은 죽을 쑤어 이고 오고, 어느 할머니는 밥을 해 이고 온다.”(매일신보, 1945. 8. 18)

하지만 건준은 곳곳에서 암초에 부딪혔다. 16일, 조선주둔군은 총독부에 사전 협의 없이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를 요청한 것을 항의했고, 이후 군이 치안 유지를 담당하겠다고 통보했다. 해방 직후 건국치안대가 장악했던 경성방송국은 18일 일본 헌병대의 손에 넘어갔다. 당일 라디오에서는 “조선주둔군은 건재하다… 단호히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일본군의 입장이 방송되었다. 조선주둔군은 전투 병과(兵科) 병사들을 헌병으로 보직 변경해 미군의 진주 전까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했다. 패전 당시 2500여 명이었던 헌병 병력은 1만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각인각파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결성되었던 건준 조직은 점차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 인사들에게 장악되었다. 건준에 우파 인사를 보강하려던 안재홍의 시도는 공산당 계열의 반대로 실패했다. 안재홍은 건준을 떠나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당을 창당했다. 건준을 장악한 공산당 세력은 미군 진주를 이틀 앞둔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급조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부주석에는 각각 미국에서 아직 귀국하지 못한 이승만과 건준을 대표해온 여운형이 추대되었다. 그 밖에 내무부장 김구, 재정부장 조만식, 문교부장 김성수 등 공산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다수의 우파 인사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름을 올렸다.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조직 자금을 제공받았다고 기록한 미군정 비밀문서. /국사편찬위원회

엔도와의 회동 이후, 여운형은 친일 논란과 2000만엔 수수설에 시달렸다. 이는 진주 직후 미군 정보참모부가 작성한 비밀문서에도 남아 있다. “조선총독은 건준에 (약 2000만엔으로 추정되는) 막대한 재정적 후원과 공공 집회 개최권, 사무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도시와 촌락에 선전 전단을 뿌릴 수 있도록 교통편과 일본 항공기를 제공했다. (……) 이 조직의 지도자 여운형은 한국인들에게 수년 동안 친일 협력자이자 정치가로 잘 알려져 있다.”(‘G-2 Periodic Report’, 1945. 9. 12)

1940년 이후 여운형은 전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조선총독과 총리대신을 역임한 고이소 구니아키, 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등 일본 최고위급 인사들과 교류하며, 시국과 전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1946년 미군정은 전범재판을 받고 있던 이들을 상대로 여운형의 친일 행적에 대해 조사했다.

일본 최고위급 인사들이 여운형을 ‘멘토’로 대우한 것은 그가 조선의 민족지도자를 넘어,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여운형은 중국, 소련, 몽골, 베트남 등 동아시아 각국 혁명가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해 레닌과 2차례 면담했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 소련 지도자들은 물론 훗날 중국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는 취추바이, 몽골인민당 지도자 솔린 단잔, 베트남의 호찌민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여운형은 쑨원과 오랜 친분이 있었고, 중국국민당 당원, 공산당 당원 대우를 받았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을 통치한 3명의 지도자, 국민당의 장제스, 공산당의 마오쩌둥, 일본 괴뢰정부의 왕징웨이와 모두 친분이 두텁고 개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은 조선과 일본에서 여운형이 유일했다. 이런 여운형에게 일본 정부는 대중국 협상의 중재를 바란 것이었다. 치안 유지 요청 몇 달 전, 엔도는 여운형이 정양 중이던 팔당까지 찾아와 중국으로 가서 국민당, 팔로군과 일본의 휴전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운형이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조직 자금을 제공받지 않았다면, 총독부는 35년 동안 착취했던 조선인에게 염치없게도 ‘공짜로’ 자신들을 위한 치안 유지 활동을 요청한 셈이었다. 여운형은 건준의 조직 자금의 출처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일본 최고위급 인사들을 상대로 한 미군정의 ‘여운형과 일본 정부의 관계에 대한 조사의 최종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여운형이 비밀 요원으로서 일본 정부를 위해 봉사했거나 다른 외국 정부의 밀사로서 활동했다는 증거는 없다. (……) 경무국장 니시히로는 여운형에게 조직 자금으로 100만엔을 주었고, 이는 평화 유지를 위해 여운형의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버치문서 Box 1-G, 1947. 1. 11)

<참고 문헌>

미군 정보참모부 비밀문서(G-2 Periodic Report), 1945. 9. 12

김영택, ‘8·15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을 선택한 배경과 담판 내용’, 한국학논총, 제27집, 2007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 2021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1′, 한길사, 2004

유성연, 남광우, ‘해방직후 좌·우파 계열 무도인들의 치안 활동’, 대한무도학회지, 제22-1집, 2020

윤덕영, ‘8·15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한계와 좌·우 분립의 배경’, 사학연구, 제 100집, 2010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이정식,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역사학보, 제134·135집, 1992

조건, ‘해방 직후 일본군의 한반도 점령 실태와 귀환’, 한국학논총 제47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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