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그 어디나 하늘나라

기자 2023. 6. 10.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의 첫 ‘퀴어문화축제’는 2014년 신촌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다. 그날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이상한 날이었다. ‘천국’은 다양한 모양으로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참가자들을 통해 만났다. ‘지옥’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과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주의 말을 쏟아냈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퍼레이드 차량 앞에 누워 통성 기도를 했다. 그날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난입한 훼방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수적 그리스도인인 나를 그해부터 매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게 만든 이들은 ‘음란한 축제로 시민들을 미혹시킨 동성애자’들이 아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한 개신교인들이다. 퀴어문화축제 참가는 나의 연대 활동이자 신앙적 결단이기도 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

코로나19로 멈췄던 오프라인 축제가 재개된 2022년. 광장을 누비며 축제를 즐기는데 축제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 행렬 중 첫 번째로 출발하는 ‘무지개예수’ 차량 뒤에서 현수막을 들고 함께 행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잠깐 들고 있다가 중간에 슬쩍 빠질 생각으로 맨 앞에 섰다. 그런데 출발과 동시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거세져 나만 무사하겠다고 빠지기에는 미안한 상황이 돼버렸다. 결국 두 시간 내내 폭우를 맞으며, 차량에서 나오는 찬양을 함께 부르며, 나만의 ‘찬양 집회’를 즐겼다. 언제 마지막으로 경험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성령의 은혜가 내 몸과 영혼을 흠뻑 적시고 난 후에야 비는 그쳤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날 서울에는 우리가 행진한 그 주변만 비가 내렸다고 한다. 정말 ‘성령의 단비’였을까?

그날 광장 바깥에는 퀴어문화축제 측보다 더 성능이 좋은 장비로 무장한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개신교의 맞불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혐오는 연대를 이길 수 없었다. 우리는 땡볕에도, 폭우에도, 혐오에도, 폭력에도 축제를 열고 서로를 축복하며 즐길 자유와 권리를 가진 주님의 자녀들이었다.

올해 퀴어문화축제는 서울광장에서 열리지 못한다. 서울광장 사용을 결정하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에서 수년간 진행된 축제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불허하는 대신, 개신교 찬양 집회인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를 허가했다. ‘열린 광장’이란 말이 무색한 편향적 결정이다. 그 광장에서 아무리 거룩한 찬양 집회를 해봤자 소용없다. 그럴수록 개신교의 고립은 가속화될 것이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대구에선 ‘대구기독교총연합회’가 동성로에서 열릴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집회 가처분 신청을 했고, 홍준표 대구시장은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지만 성다수자의 권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희한한 말로 혐오세력의 손을 들어줬다. 다수자를 위해 소수자는 차별과 혐오를 당해도 괜찮다는 뜻일까?

어쨌든 축제는 열릴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는 퀴어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과 연대하는 시민이 함께 지켜온 소중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나는 참여할 예정이다. 감히 예언하자면,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도 우리와 함께 행진하실 것이다. 개신교 찬송가 중 이런 가사가 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부르고 싶다. 퀴어들과 행진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