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집착으로 얼룩지다, 베토벤의 비틀린 가족사

2023. 6. 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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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음악가들은 확실히 좀 별나다. 감수성이 예민해서인지,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매사에 흥분을 잘하고 감정의 변화가 심하다. 관심이 자기 자신뿐이라 주변을 살피지 못하거나 남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이들 그렇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다. 음악가니까. “그래야 예술을 하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음악만 잘한다면 괴팍한 것쯤은 용인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음악가에게 관대해진 것은 베토벤부터다. 그 이전의 음악가들은 지체 높은 귀족의 신하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관용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저 충실한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했을 뿐이다.

안하무인 자기중심적인 괴팍한 성격

젊은 시절 베토벤의 초상(위 사진), 베토벤의 할아버지를 그린 판화(아래 사진). [중앙포토]
베토벤은 평생 단 한 번도 신하로서 왕이나 귀족을 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지체가 높은 귀족이라도 초대를 거절했다. 베토벤은 “세상에 왕자는 수천 명이 있고 또 앞으로도 나오겠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 당당하게 주장했다. 프랑스대혁명 직후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음악가들이 여전히 귀족에 예속된 식솔로 여겨질 때였음에도 말이다. 베토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자신이 빈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던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토벤의 능력을 높이 사고 그의 작품을 너무나 좋아했던 리히노프스키는 베토벤에게 매년 거액의 돈을 지급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저택에 베토벤의 거처를 마련하고 가족으로 대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베토벤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연주조차 거부하는 그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스폰서에게도 그랬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오죽했을까. 그 중에서도 베토벤의 자필 악보를 필사해야 하는 사보가들의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다. 타고난 악필이었던 베토벤은 성의 없게 대충 악보를 적어 보냈을 뿐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거나 고생해서 필사를 끝내놓고 나면 다시 수정하라고 요청하기 일쑤였다. 하녀들에게도 계란 반숙이 알맞게 익지 않았다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 근거 없이 그들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했으며 자기 물건을 훔쳐 간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베토벤의 충실한 제자 쉰들러조차, “오늘도 베토벤의 기분 변화가 지나치게 심해서 너무도 견디기 힘들다”며 어려움을 토로했고, “베토벤이 1년 이상 아무런 문제없이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웃과도 사소한 일로 다툼이 잦았다. 그 때문에 베토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빈에 정착해서 지낸 40년간 무려 일흔 번이나 이사해야만 했다. 거처가 자주 바뀌어서 주소를 몰라 애를 먹는 출판업자들에게는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라고만 적으면 자기에게 다 배송이 된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늘 혼자였고 외로웠다. 비뚤어진 베토벤의 성격은 불행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인 데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했으며, 어머니는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았다. 셋째로 태어났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었던 베토벤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자기 아버지와 단둘이서 살았다. 베토벤의 조부는 네덜란드의 리에주에서 교회 음악가로 일하다가, 클레멘스 대주교의 중재로 본에 와서 궁정 음악가로 활약했던 존경받는 음악가였다. 문제는 아들인 베토벤의 아버지가 그의 눈높이에 크게 못 미치는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아들이 늘 못마땅했고,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결혼을 한 후 알코올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더니, 업무에 지장을 주는 수준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은 아예 포기한 듯 보였다. 그는 특히 베토벤에게 잔인할 정도로 엄격했고 종종 폭력적이었다. 아내가 사망하자 그의 음주벽은 더욱 심해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나마 2년 후에는 아예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17살이었던 베토벤은 그때부터 사실상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는 어린 두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궁정에 편지를 써서 아버지를 은퇴시키되 연금을 술로 낭비하지 않도록 자기 앞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해야 했다. 베토벤은 이 일을 상당히 수치스럽게 여겼고 이 기억은 베토벤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베토벤,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가해자

베토벤이 빈에서 살았던 집 ⓒ 1971markus. [사진 사회 평론]
베토벤은 두 동생의 보호자가 되었지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지 못했던 때문인지 동생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베토벤은 동생들에 대해 늘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으며, 그럴수록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특히 동생들이 결혼을 해서 베토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관계는 최악으로 변했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버림받았던 상처 때문이었을까. 베토벤은 그럴 때면 동생들이 자신을 배신한다고 여겼으며, 자신이 먼저 동생들과의 연락을 끊었다. 가족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첫째 동생이 남긴 조카 카를의 양육권 분쟁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동생은 처음에는 베토벤을 자기 아들의 후견인으로 정했다가, 사망하기 직전 마음을 바꿔 자기 부인 요한나와 형 베토벤을 공동 양육권자로 지명한다. 베토벤은 제수인 요한나를 싫어했기 때문인지 동생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조카 카를에 대해 독점적 양육권을 갖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베토벤은 판사에게 요한나의 평소 행실이 부도덕하다는 탄원서를 냈으며, 심지어 요한나가 동생을 독살했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하고 그녀가 자신의 하인을 매수하여 자기를 감사하고 있다는 망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5년간이나 이어진 법적 다툼에서 많은 돈과 노력을 쏟아 부은 덕에 베토벤은 마침내 카를의 양육권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카를을 자신의 아들로 여기며 애정을 쏟았지만, 카를은 이를 집착으로 여겼으며, 이에 대한 반발을 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것으로 표시했다. 카를은 베토벤이 보낸 대학에 입학한 후 술과 당구에 빠져 지냈고, 그럴수록 베토벤은 그를 더욱 혹독하게 대했다. 카를에게 용돈의 사용처를 하나하나 영수증을 확인하면서 추궁할 정도였다. 삼촌과 조카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았던 때, 당시 19세이던 카를은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두 자루의 총을 사서 자신의 머리에 두 발의 총을 쏘았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으나, 이 일로 베토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후 카를은 베토벤으로부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고, 군대에 입대함으로써 베토벤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카를이 입대하기 전 다행히 베토벤과 카를은 베토벤의 둘째 동생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화해를 할 기회를 가졌지만, 이때부터 베토벤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몇 달간 침대에서 누워 지내다가 결국 사망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임종을 카를이 지켜주기를 바랐으나 군대에 입대한 카를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베토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카를에게 물려주었고, 카를은 베토벤으로부터 받은 유산 덕분에 평생 특별한 직업을 갖지 않은 채 5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며 평탄한 삶을 살았다.

가족이란 소중한 존재인 동시에 때로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가족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못한 채 만난 최초의 타인이며 인간관계의 갈등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곳 역시 가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베토벤의 경우처럼 가정 내에서 심각한 갈등과 폭력이 발생하면 아이에게 평생 깊은 상처로 남게 된다. 베토벤은 비틀어진 가족사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어린 시절 그가 경험했던 학대와 방관은 후에 동생들과 조카에게 집착의 형태로 나타난다. 좀처럼 끊기 어려운 사슬이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평론가들은 그러한 내면적 갈등이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베토벤에게는 가혹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어쩌면 그저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을 것이므로.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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