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개념 재정립… 여성사 패러다임을 바꾸다

김수미 2023. 6. 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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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역사가 스콧 대표작
성별 구분 넘어 역사 분석 도구로
性 차이 주목하면 평등 가치 훼손
‘시어즈 소송’ 女 일반화 대표 사례
“평등·차이 간 양자택일 불가능
개인·집단 차이 인정, 정치 역할”

‘젠더(gender)’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단어 중 하나다. 생물학적 성(性)과 대비해 ‘사회적 성’이라는 의미로, 1995년 북경 제4차 여성대회 정부기구 회의에서 섹스(sex)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섹스가 남녀 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반면, 젠더는 남녀의 대등한 관계를 내포하며, 평등에서도 모든 사회적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어서다. 그러나 취지와 달리 최근 청년층의 젠더 갈등이 심화하면서 젠더는 대립과 갈등의 상징처럼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페미니스트 역사가 조앤 W 스콧은 이미 30년 전 젠더를 둘러싼 이 같은 논쟁을 예견하고 젠더의 개념을 확대,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젠더를 단지 성을 구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역사적 분석의 개념 도구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이론화하고, 여성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글들을 모은 ‘젠더와 역사의 정치(원제 Gender and Politics of History)’가 번역 출간됐다. 1988년 미국에서 출간돼 페미니즘 역사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지만, 국내에는 2018년에 나온 30주년 개정판이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1963년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베트남전 반대 시위 현장의 조앤 W 스콧. 스콧은 이와 같은 저항운동과 여성운동에 참여하며 여성사학자로 거듭났다. 사진작가 클라크 키신저, 후마니타스 제공
1970∼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씌워진 공격성과 정치성을 희석하고 역사학계에 편입되고자 젠더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콧은 페미니즘 역사학이 단순히 역사에 배제됐던 여성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 자체를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그 개념을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젠더의 개념을 ‘성별에 따른 역할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이며, 남녀가 그 기준에 맞게 길러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 역시 젠더의 잠재력을 축소하는 것이라고 경계했다.
스콧에 따르면 젠더는 성(性)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해 두 성별에 따라 개인들을 분류하고 배치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용어다. 성별에 따른 역할 규정을 넘어 이분화한 성별 범주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는 젠더가 남녀 간 차이를 표현하고 그 차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면서 오히려 가족, 국가 같은 체계 내 위계질서를 정당화했다고 지적한다.
1978년 제4차 버크셔 여성사학회에 참석한 여성들. 여성사 논문만을 발표하는 가장 큰 학술대회로,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후마니타스 제공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모순적인 두 명제를 양립시키는 것은 페미니즘의 가장 큰 난제이기도 하다. 미국 ‘시어즈 소송’은 이 같은 평등론과 차이론 논쟁의 대표적 사례다.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평등위)는 1978년 유통 대기업 시어즈 로벅 앤드 컴퍼니가 고임금인 위탁 판매업자 채용 시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 직원에 대한 승진 차별, 임금 차별을 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시어즈 측 변호인단은 여성이 남성과 달라 위탁 판매업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성별 간 ‘근본적 차이’가 노동력 배치의 성별 불균형을 가져왔다는 ‘차이론’을 내세운 것이다. 반면 평등위는 여성과 남성이 상반된 습성이나 관심을 갖고 있다고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여성도 더 높은 지위, 위험 부담이 큰 업무를 선택할 수 있음에도 여성을 하나의 범주로 일반화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정치·사회 분위기 속에 평등위는 성 차별 경험을 증언해 줄 증인을 찾지 못했다.

8년을 끈 소송에서 재판부는 시어즈 측의 손을 들어줬다. 스콧은 “(이 소송으로) 차별은 단순히 자연적인 차이를 인정한 것으로 재정의됐고, 불평등을 대신해 차이가 평등의 반대말이 되면서 차이는 불평등을 설명하고 정당화했다”고 비판했다.
조앤 W 스콧/정지영 외 4인 옮김/후마니타스/2만5000원
그는 평등과 차이가 이분법적으로 대립할 경우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기반으로 구축된 담론에서는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과 같아질 수 없으므로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별이 가진 집단 정체성을 앞세워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 또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성 차이를 인정하면서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저자는 평등과 차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하고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며, 이처럼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젠더 갈등을 되레 선거 전략으로 이용하는 우리나라 정치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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