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민의 노크] 포니의 시간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는 1955년 출시된 '시발(始發)자동차'를 기원으로 꼽는다. 당시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최무성과 두 동생은 미군이 내다버린 드럼통과 폐기 차량 부품을 끌어모으고, 엔진 기술자 김영삼을 영입해 일부 주요 부품을 직접 만들어 차량을 조립했다. '시발'이라는 이름에는 국내에서 자동차 생산을 시작한다는 뜻이 담겼다. 시발자동차는 출시된 해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유명해졌다. 당시 상류층에선 이 차를 사기 위한 '시발계'까지 유행했다. 철판을 두드려 폈기에 모양은 투박했고, 부품 품질이 균일하지 않아 주행하는 내내 털털거리기 일쑤였지만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시발자동차 등장으로부터 20년 지난 1975년. 한국 자동차사에 큰 족적을 남긴 모델이 또 하나 탄생했다. 이름은 포니(Pony·조랑말). 포니라는 이름은 국민 공모 방식으로 지어졌다. 응모에는 5만8223명이 참여했다. 아리랑·무궁화 등 여러 후보를 제치고 포니가 최종 선정됐다. 수출을 고려하면 세계인이 쉽게 이해하는 이름이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포니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0년대 초 한국 정부는 자동차 생산의 국산화율 제고를 목표로 잡았다. 현대차는 정부 정책에 따라 자동차 독자 생산을 추진했다. 이전까지 현대차는 포드와 기술제휴를 맺고 라이선스를 받아 차량을 조립했다. 자동차 설계 기술이 전무하고, 조립 생산 기술도 일천했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현대차 초대 사장이었던 고(故) 정세영 HDC그룹 명예회장이 발 벗고 나섰다.
포니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주지아로는 당시 자동차 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자동차 산업 기반이 부족한 한국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차를 디자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주지아로는 반신반의했다. 정주영 회장은 주지아로를 울산으로 초청했다. 현대가 그리스에서 선주문을 받은 선박 2척이 3년 만에 건조된 모습을 주지아로는 두 눈으로 확인했다. 주지아로는 이때를 두고 '현대 스피드'를 실감한 순간이라고 회상한다. 현대차가 주지아로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포니 시제품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8개월이었다.
출시 첫해인 1976년 포니는 국내에서 1만4050대가 팔리면서 단일 모델 판매 기록을 경신했다. 시장 점유율은 단숨에 40%를 넘었다. 미국은 현대가 자동차 산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망하면 한국 경제가 휘청거릴 수 있다고 기우했다. 1977년 리처드 스나이더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정주영 회장에게 제안했다. "독자 개발을 포기하십시오. 포드든 제너럴모터스(GM)든 크라이슬러든 선택만 하십시오. 유리한 조건으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돕겠습니다."
한국의 첫 고유모델인 포니는 1990년 단종됐다. 거리에서도 포니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고성능 전기차를 넘어 로보틱스·미래항공모빌리티(AAM) 등 미래 신산업을 추진하고 있는 현대차는 역사 속에만 있던 포니를 다시 끄집어냈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변에 위치한 현대모터스튜디오를 방문하면 스나이더의 제안을 듣고 침묵 뒤에 내놓은 정주영 회장의 답변도, 손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그리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도 확인할 수 있다.
[문광민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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