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미래] 문학은 현실보다 위대하다
서울 강남의 풍월당에서 매달 문학작품을 함께 읽고 있다. 지난달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었다. 화자인 '나'는 자신을 무시하는 세상에 지기 싫어 지하에 자신을 유폐한 채 살아간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수시로 떠오르는 사유들을 숙고해서 기록하는 것뿐이다. 이 기록은 돈 없고 지위 낮은 자를 멸시하는 세상과 싸우고, 예민하고 감수성 있는 인간을 따돌리는 현실과 다투는 한 인간의 내적 투쟁을 담고 있다. 현대 문학은 이 수기로부터 탄생했다. 인간에겐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알 수 없는 내적 진실이 있고, 작가라면 마땅히 이 진실의 드라마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읽을 때마다 깨닫지만 문학은 현실보다 위대하다.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뜻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 그러나 작품 속 인간은 그 본질과 성격을 온전히 실현하면서 살아간다. 문학작품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인간, 나보다 더 나다운 내가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작가는 작품에 아무나 등장시키지 않는다.
좋은 작가는 사무실에서 욕하는 여성을 함부로 그리지 않는다고 미국의 문학 편집자 마이클 데이니는 말했다. 심한 말로 직원을 다그치는 여성 상사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선 어떤 인물도 실제보다 중요하다. 작품의 여성은 독자에게 유리천장을 깨고 고위직에 오른 모든 여성을 상징할 수 있다.
고함치는 숱한 남성 상사를 버려두고, 드문 소수를 택했다면 특별한 진실이 그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 내적 진실이 없을 때, 작품 전체의 그럴듯함이 무너진다. 현실에선 남녀 모두 패악을 떨 수 있으나, 작품 속에선 남성의 패악질이 더 그럴듯하다. 문학이 흔히 다수를 비판하고 소수를 옹호하기 쉬운 이유다. 도스토옙스키도 러시아의 엄격한 신분 질서 탓에 절망하고 좌절한 지식계급의 우울과 불안을 그려냈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쓰는 문학과 같다. 좋은 정치가는 자신의 공적 삶을 작품으로 만든다. 한 정치가가 다수의 권리를 존중해 소수자 요구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수의 진실은 현실에 이미 넘치게 반영돼 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존중받는다. 가령 비장애인은 대중교통 이용이 어렵지 않다. 다수의 권리를 외치면 장애인은 영영 힘겹게 살아야 한다.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다.
인권은 누구나 타고난 권리이나 인권의 실현은 다수가 소수를 배려하고 정치가 이를 이끌 때만 가능하다. 어떤 사태의 내적 진실을 숙고하지 않을 때 거기엔 위대함이 없다. 눈치 없는 작가가 위대함을 얻지 못하듯, 눈치 없는 정치는 큰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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