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돌봄과 간수

2023. 6. 9. 17: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근 1년 동안 알고 지낸 동네 아저씨는 비닐하우스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분인데, 저녁시간이 온통 술이다. 일을 끝낸 현장에서 막걸리 1병을 마시고 저녁에 반주로 소주 2~3병을 더 마신 후 기분이 좋아진 상태에서 일찍 자고 다음날 똑같은 일을 이어나간다. 예순 중반이 넘은 나이에 이 정도 술을 몸이 견딘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 아침운동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제도 3병을 드셨냐고 물어보는 게 어느덧 나의 일과가 되었다.

사실 술과 일이 삶을 간결하게 양분하는 이런 일상은 낯선 게 아니다. 우리 상당수의 일상이기도 하다. 나도 정도는 약하지만 일과 술로 양분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밖에서 약속을 잡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과 집에서 혼자 반주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지 일독을 술독으로 돌려막는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만큼 술을 마실 때 대화들이 재미가 없다. 멋모르는 꿈들로 머리가 가득 차 있을 때는 술을 마시는 시간이 꿈꾸는 시간이었고, 꿈과 꿈들이 만나서 아름다운 세상을 펼쳐보였지만, 요즘은 술자리의 열정이 예전 같지 않고, 경제 사정이나 건강 상태, 주변 인물들 험담이나 뒷담화에 그치고 있다. 술을 마실수록 입에 쓴물이 돌고, 정신도 공허해진다.

루쉰은 말했다. 삶은 비극이지만 영웅처럼 극적인 비극보다는 일상의 소리 없는 비극이 훨씬 많다고.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것들, 반복되는 것들에 익숙해져 생각하기를 멈추고 눈으로는 보지만 그 안의 실체와는 따로 놀고, 귀로 듣지만 그 속마음은 듣지 못하는 제자리 돌기의 팽이처럼 돌다가 픽 쓰러지는 삶이 비극 그 자체인 셈이다.

누구나 점점 나태해지고 병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못견뎌하다가 탈출구를 찾게 마련이다. 최근 나는 그것을 '돌봄'과 '간수'에서 찾았다. 돌봄은 반려동물·반려식물과 관련된 것이다. 거북이들을 입양해 1년 넘게 키우다보니 돌봄의 기쁨을 알게 됐고, 또 돌볼 게 없을까 눈길을 돌리다보니 실내 식물을 잔뜩 들여서 키우고 있다. 떡잎이 나오고 키가 커지는 기쁨에 식물의 생리를 공부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내 손길이 비밀스러운 지식들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결국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이 단순한 돌봄의 순환이 삶의 활력이 돼준다. 식물의 뿌리를 털어준다든지, 바로 위의 사이즈로 분업(분갈이)을 해준다든지 하는 소소한 깨달음과 눈을 맞추다보면 사물과 대화하는 법도 익히게 된다.

간수는 새로 사귄 친구 덕분에 내 생활에 들어온 개념이다. 나보다 열 살 많은 그 친구는 내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이지만 여기선 편의상 친구라 하자. 그는 짠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만큼 물건을 아낀다.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 대처에 나왔고 오랜 자취와 이런저런 돈벌이로 전전해본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루는 그가 가지고 있는 고동색 소가죽 필통이 윤기가 자르르해 도대체 몇 년이나 쓴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무려 40년이 된 것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일상의 도구들과 이렇게 오래 함께 하기 위해선 그것과 자신을 강하게 결합시켜야 한다. 뭘 살 것인지부터, 물건을 일상에 어떤 식으로 배치할 것인지, 고장 나지 않게 관리하는 방법 등이 전부 머릿속에 있었다. 우산만 들고 나오면 잃어버리고 돌아가는 나 같은 족속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선 유형이다. 어느덧 나는 그를 관찰하면서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이 '나'라는 고장 난 물건을 고쳐나가는 일과도 유사해서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돌봄과 간수는 서로 상통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간수(看守)는 '보고 지킨다'라는 뜻이다. 자기 품 안에 넣고 잘 돌봐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돌보면 저절로 간수가 되고, 간수하기 위해선 반드시 돌봐야 한다. 잘 간수한다는 것은 내 삶의 영역에서 의미 없는 것들을 걷어내고 기억과 체취가 가득한 것으로 채운다는 의미가 있다. 나와 사물이 엉망으로 엉클어져서 뒤죽박죽인 일상에서, 사물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가 생기고 오솔길 같은 길이 생기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 삶은 비극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내 화두는 돌봄과 간수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