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과 나란히’ 소개 조병옥…제주도민들 “그 이름 당장 내려”

허호준 2023. 6. 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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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시가 제주4·3 초기에 무차별 검거 등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조병옥을 지역 대표 '호국인물'로 선정해 4·3단체와 유족들이 반발하고 있다.

제주4·3유족회와 4·3범국민위원회 등 4·3 관련 단체들은 9일 성명을 내어 "천안시와 박상돈 시장은 조병옥의 호국 인물 선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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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호국 보훈 인물 5인’ 선정에 제주 4·3단체 반발
천안시청 전경. 천안시 제공

충남 천안시가 제주4·3 초기에 무차별 검거 등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조병옥을 지역 대표 ‘호국인물’로 선정해 4·3단체와 유족들이 반발하고 있다.

제주4·3유족회와 4·3범국민위원회 등 4·3 관련 단체들은 9일 성명을 내어 “천안시와 박상돈 시장은 조병옥의 호국 인물 선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천안시가 최근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태조산 보훈공원 내 천안을 대표하는 호국보훈인물 5인 중 한 명으로 조병옥을 선정하고 ‘민족운동의 지도자’라는 문구가 포함된 표지판을 설치한 데 따른 것이다. 시가 선정한 ‘천안을 대표하는 호국 보훈 인물 5인’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이동녕, 조병옥, 오규봉, 로버트 R. 마틴 5명이 이름을 올렸다. 시가 설치한 안내판에는 조병옥이 유관순 열사와 나란히 소개돼 있다. 시는 앞서 지난 4월17일부터 21일까지 시민을 대상으로 시청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들어 이들을 호국 보훈 인물로 선정했다.

4·3 단체들은 “조병옥을 ‘민족운동의 지도자’라고 추켜세운 천안시와 박상돈 시장의 이번 결정은 4·3 유족을 넘어 천안시민은 물론 대한민국의 평화와 인권 수호에 앞장서는 일반시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다”며 “일제 강점기 3·1운동의 상징적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천안이 단지 지역 출신을 근거로 조병옥을 유관순 열사와 동급으로 ‘천안의 대표 호국보훈 인물’ 5인으로 선정한 것 자체가 4·3의 비극을 부정하고 평화와 인권, 상생의 정신을 왜곡하는 몰역사적인 행태”라고 분노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천안시는 2021년 9월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기념공원에 조성했던 조병옥 동상 철거 사태를 겪으며 충분히 비판받은 바 있다. 당시 시는 전문가들과 자문회의를 거쳐 철거라는 결정을 내렸는데 그런 결정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냐”고 꼬집었다.

4·3 유족과 관련 단체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조병옥의 4·3 당시 행적 때문이다. 천안 출신인 조병옥은 제주4·3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강경진압을 주도한 인물이다. 4·3의 신호탄이 된 1947년 3·1절 제주도 기념행사를 구경하던 초등학생과 부녀자 등 6명이 경찰 발포로 희생된 데 대해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은 경찰의 정당방위라고 강변하고, 시위 참가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 바 있다.

정부가 2003년 10월 펴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 방문 첫날 오후(1947년 3월14일)에 제주도청을 방문, 파업 중인 공무원들에게 파업 중지를 촉구했다. 이날 현장에 있었던 한 공무원 출신은 ‘조병옥 경무부장이 도청 안의 사무실에 도청 직원들을 불러 놓고 파업 중지를 촉구한 뒤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놀라운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회고했다”고 적혀 있다.

보고서는 또 “조 경무부장은 응원경찰대가 충원된 15일부터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략) 이틀 새 검거된 사람은 200명에 이르렀다. 이런 검속은 계속돼 연행자는 3월 말 300명, 4월10일께는 500명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1948년 6, 8월의 신문에도 당시 군정장관 딘 소장과 조 경무부장이 “단시일 내에 사건 수습을 하라 하며 불응자를 무차별 사살하라고 명하였다”고 보도한 바 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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