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희극과 '말맛' 살린 창극의 만남…'베니스의 상인들'
역대 최다 62곡 작창…김준수·유태평양, 상반된 캐릭터로 매력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구성진 소리로 한 서린 정서를 표현하는 데 탁월한 창(唱)이 서구문학의 희극과 잘 어울릴까.
지난 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첫 공연을 올린 국립창극단의 신작 '베니스의 상인들'은 창극의 무한한 변화 가능성을 제시했다. 원작인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창극의 '말맛'을 덧입으면서 흥이 넘치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국립창극단은 앞서도 고전 작품을 창극으로 선보인 바 있지만, '리어', '트로이의 여인들', '메디아' 등 비극에 집중했다. 희극을 창극으로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원작의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대규모 자본가로, 무역상 안토니오를 소상공인 조합의 대표로 탈바꿈했다. 원작에 담겼던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거두어내고 현대적인 해석을 입힌 것이다.
공연은 막이 오르기 직전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솟은 돛대에 오른 배우의 손 인사로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곧이어 무대에 선 안토니오와 소상인 조합원들이 희망차고 신명 나는 음악과 노래로 판을 깔았다.
이탈리아 무역항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안토니오의 넉살 좋은 웃음이나 한복 의상, 강강술래를 하듯 대형 원을 만들며 돌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전통적인 춤동작이 마치 부산항에 온 듯 친숙한 느낌을 줬다.
공연은 역대 창극단 작품 중 가장 많은 62개 곡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62곡 모두 전통 소리를 우리의 장단과 음계를 이용해 만든 작창곡이다. 공연 중간중간에는 언어유희로 짜인 노랫말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인 조합원들이 인도로 배를 출항시키고 부르는 노래에 '양털'과 '개털'을 대칭적으로 배치한 부분이나 이곳의 화폐 단위인 '더컷'과 연계해 '걱정일랑 그만 컷(cut)'이라는 가사를 넣은 대목이 대표적이다. 영어뿐만 아니라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의 줄임말) 투자' 등 요즘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이는 단어들을 활용한 점도 눈에 띄었다.
언어유희가 주는 유쾌함은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대립과 함께 극의 한 축을 이루는 벨몬트 섬의 주인 포샤와 포샤에게 구애하는 바사니오의 이야기에서 폭발했다. 7개 보석 가운데 결혼을 축하하는 편지가 담긴 보석을 골라야 하는 장면에서는 다이아몬드, 진주 등 보석 이름을 활용한 기발한 노랫말로 창극 특유의 '말맛'을 살려냈다.
이날 공연은 초연 개막공연임에도 탄탄한 극의 구성과 출중한 실력을 갖춘 출연진, 3만 송이 꽃이 달린 나뭇가지나 대형 범선과 같은 무대 장치 등으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선명한 대결 구도는 대자본가와 소상인들의 조합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뚜렷하게 드러냈고, 포샤와 바사니오의 사랑 이야기는 극에 활기를 주면서도 2부의 법정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만 대자본가와 소상인 조합의 대립 안에 정경유착, 상업 보호 등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 교과서를 옮긴 듯한 딱딱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국립창극단의 대표 스타인 유태평양과 김준수는 각각 안토니오와 샤일록으로 상반된 매력을 발산했다. 유태평양은 푸근하고 묵직한 소리로 극을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김준수는 전자 음악에 맞춰 절도 있게 소리를 뽑아내며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공연 말미 김준수의 절규하는 듯한 독창에는 박수 세례가 길게 쏟아졌다.
포샤 역의 민은경도 폭발적인 성량으로 시원하게 소리를 뽑아냈고, 바사니오 역의 김수인은 노래를 부를 때는 구성진 소리꾼으로 연기를 할 때는 재간둥이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전통 창극에는 쓰이지 않는 록, 팝, 헤비메탈 등 빠른 박자의 현대 음악을 입혀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주로 샤일록의 등장에 쓰인 현대음악은 긴장감을 높이고, 악인의 캐릭터를 강조하는 효과를 줬다. 다만 음악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창극 본연의 소리가 묻힌다는 아쉬운 반응도 나왔다.
공연은 11일까지.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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