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조선에선 거지들조차도 여유로웠다"
지그프리트 겐테 (1870~1904)
간혹 유럽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자연스럽게 관광지 잡상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내가 한국인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어색한 발음으로 "바쁘다 바빠… 빨리 빨리… 싸다 싸"를 연발한다. 그들에게 한국인은 '빨리'를 외치는 조급한 국민으로 특징지어진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부터 그런 성정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1901년 독일 쾰른신문사 특파원이자 지리학 박사인 지그프리트 겐테가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는 6개월 동안 서울을 비롯해 강원도, 제주도 등을 돌아본 소감을 훗날 퀼른신문에 연재한다.
내용 중 이런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곳 먼 동양에서 유일하게 누구나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시간'이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거지라도 여유롭게 시간을 즐길 줄 알았다. 나처럼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서양인들은 돈의 개념으로 시간을 환산하고 시간에 인색해 한다. 그러나 시간에 관한 한 모든 조선인들은 부자다."
놀랐다. 120년 전 벽안의 이방인에게 한국인은 거지조차도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여유로운 민족이었다.
겐테는 한술 더 떠서 말(馬)들까지도 여유로웠다고 술회한다.
"특히 이곳의 말들은 독일 전체 기병사단이 행군할 때 취하는 휴식 시간보다 더 넉넉한 점심시간을 요구한다. 조선의 말들은 순수 토종마로 정말 사치스러운 동물이다."
조선 사람들의 풍류를 묘사한 부분도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춤은 모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진정한 조선의 전통 놀이인 것 같다. 춤은 낙천적인 기질을 가진 조선인들의 정서에 어울리는 즐거운 오락거리다. 춤이 없는 가족 잔치는 상상할 수 없으며, 춤 없이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선비들의 흥겨운 잔치도 열 수 없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겐테는 한라산 높이 1950m를 처음 측정한 인물이다.
1890년대 말 제주 근해를 지나는 일본 기선에 승선했던 겐테는 멀리서 한라산의 모습을 보고 반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국에 온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제주도를 찾았다. 등산로도 없는 산길을 2박 3일 동안 올라 백록담에 도달했다.
"아네로이드 기압계로 신중하게 측정해본 결과 분화구 맨 가장자리 높이는 해발 1950m다. 백인은 아직 한 번도 오르지 못한 한라산 정복은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다. 무한한 공간 한가운데 외로운 산 정상에 서 있으면 마치 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바다와 대기가 만나는 수평선은 끝없이 환상적으로 이어져 그 경계선을 구분하기 어렵다.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헤엄치는 듯 동화 같은 무한으로 이어져 있다."
겐테는 조선을 비하한 다른 서양인들의 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한국인과 제대로 의사소통한 적도 없으면서 주제넘게 책을 써서 세상에 내놓는다. 그들은 편파적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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