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의무화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 있다 [쓴소리곧은소리]
北에 정보망 해킹당했는데도 한때 점검 거부…이런 상태로 내년 총선 치를 수 있겠나
(시사저널=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모태는 대한민국의 첫 선거인 1948년 5·10 총선 직후인 그해 6월26일 출범한 선거심사위원회다. 당시엔 비상설 조직이었다. 그 후 내무부 산하에 설치된 '선거위원회'가 선거 관리를 담당했다. 행정부에 종속된 탓에 1960년 3·15 선거는 악명 높은 부정선거로 치러졌고, 이에 항의한 국민의 궐기인 4·19 혁명으로 선거위원회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후 수립된 제2공화국은 헌법을 개정하면서 행정부로부터 분리된 헌법기관으로 '중앙선거위원회'를 세웠다. 이듬해 5·16으로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중앙선거위원회는 또다시 개헌을 통해 1963년 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로 탈바꿈해 오늘에 이른다. 올해가 '선관위 60년'인 이유다.
선관위의 위상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더불어 급상승했다. 1992년엔 차관급 기관이던 선관위 사무처가 국무위원급으로 격상됐다. 사무처 수장인 총장이 장관급, 2인자인 차장이 차관급으로 대우받게 된 것이다. 그래선지 선관위 직원들끼리는 총장을 '장관님', 차장을 '차관님'이라 부른다. 여기에 역시 장관급인 상임위원, 총리급인 선관위원장 지위를 감안하면 선관위는 총리급 1명, 장관급 2명, 차관급 1명이 포진한 '슈퍼 갑 국가기관'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잘나가던 선관위가 요즘 최대 위기에 빠졌다. 5월10일 중앙일보는 "선관위 사무처의 1인자인 박찬진 사무총장과 2인자인 송봉섭 사무차장의 자녀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선관위에 채용돼 국가공무원이 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필자가 취재해 쓴 단독 보도였다. 선관위는 펄쩍 뛰었다.
총리급 1명, 장관급 2명, 차관급 1명 포진
"법에 따른 공정한 채용으로 아버지들 영향력 행사는 전무했다"고 했다. "선관위 공무원이 인기가 없다. 경력 채용되면 오지에서 몇 년씩 고생한다"라고도 변명했다. 그러나 국회 행안위 여당 간사인 이만희 의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선관위의 7급 공채 경쟁률은 82~118대 1, 9급 경쟁률도 평균 20대 1에 달했다. 게다가 선관위는 박 사무총장 딸의 공채 당시 점수란을 비워둔 채 인사담당자에게 점수를 매기게 했고, 당시 사무차장이던 박 사무총장은 이렇게 올라온 딸의 채용 승인 결재란에 직접 서명했다. 4촌 이내 친족 채용 결재 시 기관장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선관위 공무원 강령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 강령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송봉섭 사무차장도 딸이 충북 선관위에 2018년 경력 채용될 당시 인사담당자에게 전화해 딸을 추천하기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관위가 필자에게 한 변명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5월14일 선관위는 박 총장과 송 차장의 의혹에 대해 내부 특별감사를 하겠다고 물러섰다. 이어 5월16일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두 사람이 불려 나와 호된 추궁을 당했다. 그러나 박 총장은 "자녀 채용 과정에서 법과 원칙을 지켰다"고 강변해 국민의 공분은 더욱 커졌다.
5월24일에는 '자녀 특혜채용'이 4명에서 6명으로 늘어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자 선관위는 5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비리 의혹자는 11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중앙일보의 폭로 보도 보름 만인 5월25일 박 총장과 송 차장은 동반 사퇴했다. '투톱'의 동시 사퇴는 60년 선관위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5월31일엔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미흡한 정보 보안 관리와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과 부정 승진 등으로 큰 실망을 드렸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어 박 총장, 송 차장과 신우용 제주 상임위원 등 채용 비리 의혹과 관련된 고위직 4명을 수사 의뢰하고 전·현직 직원들의 친족 관계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 식 꼼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다. 아빠 찬스에 이어 '형아 찬스'까지 채용 비리 의혹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드러났는데도 선관위는 '헌법기관의 독립성'을 이유로 감사원의 감사를 거부하고, 칼날 약한 국민권익위원회의 조사만 받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원 감사는 '독립성'을 침해하는데, 권익위 조사는 '독립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논리부터 자가당착이다. 게다가 권익위 위원장은 문재인 정권의 알박기 인사 대표 격인 전현희 전 민주당 의원이니 공정한 조사가 이뤄질지도 의문이다.
박 총장과 송 차장이 자진 사퇴 형식인 '의원면직'으로 물러난 것도 선관위가 정신을 못 차렸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선관위 공무원이 사법기관의 수사 대상이 되면 퇴직이 제한되고 연금도 삭감되는데, 범죄 의혹을 받는 두 사람은 명예로운 '퇴직'을 함으로써 연금 등 혜택이 보장되는 특권을 누리게 됐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선관위는 몰래카메라 촬영과 성추행·성매매·폭력·절도 등을 저지른 직원들에게 솜방망이 처벌만 내린 사실도 확인됐다. '헌법상 독립 기관'이란 위상을 악용해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 선관위의 관행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관위 독립성'을 직원 비리 방패로 악용
선관위는 북한에 의해 내부 정보망이 해킹당했는데도 국가정보원의 보안 점검 권고를 거부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 사실도 필자의 단독보도(5월3일자 중앙일보)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선관위는 "국정원으로부터 북한 해킹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다가 국정원이 통보 일자와 IP 등 자료를 공개하면서 망신을 당한 끝에 결국 보안 점검을 수용키로 했다. 이런 마당에 선관위는 역대급 복마전 채용 비리 의혹에 대한 감사원 감사마저 거부하고 있다. 선거 관리기관에 요구되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상실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국민이 납득할 수준으로 손보지 않는다면 내년 4월 총선은 대재앙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혁의 열쇠는 뭘까. 최고 리더십부터 바꿔야 한다. 현재는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이 고른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공정성이 생명인 선관위원장직에 치명적인 결격 사유다. 게다가 선관위원장은 대법원에서 자기 일을 하기에도 정신이 없어, 선관위 업무는 사무처에 일임하게 된다. 자연히 선관위 내부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해도 선관위원장과 역시 비상근인 선관위원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 3000명에 달한다는 선관위 공무원이 선관위원장을 '바지사장'으로 세워놓고 '선피아'(선관위+마피아)를 형성해 끼리끼리 나눠먹기로 조직을 운영해온 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선관위원장을 상근직으로 전환하고, 감사원 감사를 의무화해 인사와 조직의 투명성을 실현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공정한 선거 관리'를 위한 것이지 선관위 직원들의 범죄를 감싸주는 방패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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