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의 시론]이승만이 드골보다 위대한 이유

2023. 6. 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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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주필
70년 전 한미동맹은 神의 한 수
이승만의 통찰과 외교력 덕분
드골과 함께 세계적 건국 영웅
두 지도자 의외로 공통점 많아
학생운동 격화에 스스로 하야
뿌리 잊은 나라에는 미래 없어

한미동맹은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 자유와 번영의 초석이었다.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안보 장치만 돋보이지만, 경제·기술·교육·언론 등 모든 분야가 미국 지원에 힘입어 발전했고, 한국은 그 기간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조업 최강국으로 부흥한 일본(5.1만 명), 독일(3.6만 명), 한국(2.8만 명)이 미군의 해외 주둔 1∼3위 국가라는 사실도 미국과의 동맹이 갖는 의미를 새삼 말해준다.

그런 동맹이 거저 성립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과의 군사동맹은 국익에 반한다고 봤다. 애치슨라인과 한반도 중립화 계획의 배경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탁월한 통찰력과 외교전이 없었다면 ‘신의 한 수’가 된 한미동맹도 없었다. 비밀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진 5단계 협상은 팔순을 바라보던 지도자의 눈물겨운 드라마였다.

1단계는 강력한 ‘휴전 반대’ 투쟁이다. 조기 휴전을 바라는 미국 여론을 역이용해 한미동맹을 끌어내려는 포석이었다. 미국은 1951년 5월 17일 방위계획 NSC 48/5를 통해 휴전 방침을 확정하고, 7월 10일 휴전 회담을 시작했다. 2단계는 상호방위조약을 보장받기 위한 치킨 게임이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3월엔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휴전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이승만은 “방위조약 없는 휴전 땐 독자 북진”을 천명했다. 미국은 이승만 축출을 위한 ‘에버레디 작전’까지 세웠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군이 유엔군에서 이탈하면 미군의 재앙적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부상했고, 미국은 5월 30일 ‘방위조약 약속’으로 선회했다.

3단계는 ‘선(先) 방위조약’ 압박이다. 아이젠하워는 ‘휴전협정 조인 뒤 방위조약 협상’을 6월 6일 친서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38선과 애치슨라인을 거론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회신했다. 6월 18일엔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벼랑 끝 상황에서 이승만과 월터 로버트슨 미 특사와의 담판이 6월 25일 시작됐다. 소(小)휴전회담으로 불렸던 이 협상에서 방위조약 초안이, 이승만 구상대로 휴전협정보다 10여 일 앞서 도출됐다.

4단계는 방위조약 유효 기간(제6조)을 무기한으로 못 박으려는 시도였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가조인을 위해 8월 방한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기한 유효하다. 한 당사국이 통고한 뒤 1년 뒤에 종식시킬 수 있다’로 절충됐다. 5단계는 원조를 최대한 많이 얻어내는 일이었다. 조약은 1953년 10월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됐고, 1954년 1월 양국 의회 비준 절차도 마무리됐지만, 11월 18일에야 비준서 교환을 통해 발효됐을 정도로 긴 공백기를 거쳤다. 군사·경제 지원을 구체화한 ‘한미 합의 의사록’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줄다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승만과 프랑스의 샤를 드골 사이에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의 생몰 시기(이승만 1875∼1965년, 드골 1890∼1970년)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운 지도자라는 사실까지 흡사하다. 독선적 성격과 권위주의 통치 스타일도 닮았다. 이승만은 4·19, 드골은 68혁명 여파로 스스로 하야하고 얼마 뒤 서거했다. 지도자의 우열 비교는 주관적 평가지만, 필자는 이승만이 더 위대하다고 본다. 프랑스는 1789년 시민혁명을 경험한 나라이며, 제1차 세계대전 뒤 유럽 최강국이었고, 나폴레옹 시대 등 세계를 호령한 역사도 갖고 있었다. 한국은 선거가 뭔지도 모르는 문맹률 80%의 후진국이었지만,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 두 축으로 오늘날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대를 닦았다.

드골은 오직 ‘위대한 프랑스’를 위해 프랑스를 구해 준 미국·영국과 냉전이 한창일 때 등 돌리고 나토에서 탈퇴한 뒤 소련·중국에 접근하는 전략까지 감행했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결코 자유민주 진영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데도 세계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드골과 달리 이승만은 한국에서조차 상응한 존경을 못 받는다. 번듯한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건국 영웅을 홀대하는 나라는 뿌리 잘린 나무와 같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에게 감사하는 국민적 음수사원(飮水思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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